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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8년 4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해외조직. 1925년 최원택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해외 임시기관인 일본연락부가 조직되었다가 1926년 붕괴되었는데, 이에 안광천이 박낙종에게 일본부의 재건을 지시했다. 박낙종은 1927년 4월 일본부를 조직하고 간부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1928년 2월 주요간부가 체포되면서 다시 한 번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후 1928년 4월 한림을 책임비서로 하는 일본총국의 결성이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끊임없는 탄압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 온 일본총국은 결국 1931년 해체성명서를 발표한 후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일본공산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의 해외 임시기관인 일본연락부는 1925년 11월 최원택(崔元澤)이 도쿄에서 조직했고, 1926년 4월 김정규(金正奎)가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일본연락부의 부원으로는 정운해(鄭運海)·이봉수·김한경(金漢卿) 등이 활동했는데, 1926년 7월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과정에서 조직이 붕괴되었다. 1926년 12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안광천(安光泉)은 박낙종(朴洛鍾)을 일본부 책임비서로 임명해 일본부의 재건을 지시했다.
박낙종은 1927년 4월 도쿄에서 조직부장·선전부장·검사위원에 각각 최익한·김한경·강철(姜徹) 등을 선임해 일본부를 조직했다. 일본부는 간부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같은 해 5월과 12월의 2차에 걸쳐 개최된 간부회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지도정신 확립, 당원교양, 파벌주의 박멸, 신간회와 조선공산당의 관계, 〈대중신문 大衆新聞〉 발간 등이 토의되었다.
또한 도쿄에 한림(韓林)과 김한경을 각각의 책임자로 하는 2개의 야체이카를 조직했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도쿄 조선노동조합, 신간회, 도쿄 지회 등에 당조직의 영향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한림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와 3개의 공청(共靑) 일본부 야체이카가 조직되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 과정에서 주요간부가 검거되면서 조직이 파괴되었다.
1928년 2월 27일부터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제4차 조선공산당의 조직부장으로 선임된 김한경은 같은 해 4월 한림을 책임비서로 하는 일본총국의 결성을 지원했다. 일본총국 조직 후 한림은 도쿄의 야체이카를 기존의 2개에서 4개로 늘리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신간회 도쿄 지회, 재도쿄 조선노동조합 안에 프랙션을 조직했다.
공청 일본부도 8개의 야체이카와 도쿄 조선유학생학우회, 신흥과학연구회, 재일본조선청년총동맹, 재도쿄 조선노동조합 각 지부에 프랙션을 조직했다. 1928년 6월 한림이 검거되자 조직을 책임비서 김천해 체제로 개편했다. 이 시기 도쿄의 야체이카는 5개로 증가했고, 프랙션 활동도 활발했다.
그해 7~12월까지 계속된 제4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 과정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일본총국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일본조선청년총동맹, 근우회(槿友會), 도쿄 지회, 신간회 각 지회 등의 해소실천이 끝난 1931년 10월 해체성명서를 발표하고,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일본공산당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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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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