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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2년(인조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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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93년(숙종 19)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166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검열 등을 역임했다. 1667년 왕이 전 해에 정태화·홍명하·허적을 탄핵한 언관 이숙·박중휘 등을 유배 보내고 이 사실을 사초에 기록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기록하여 파직 당했지만 곧 복직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168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김만중에 의해 장희빈의 어머니와의 오랜 연문이 왕에게 알려졌으나, 오히려 김만중이 처벌되었다.
1688년 좌의정이 되었다. 자신이 동평군 항의 근척임에도, 동평군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남구만 등을 변호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1689년 영돈녕부사에 올랐으나 1690년 동궁책봉하례에 참가하지 않아 고성에 유배되어 2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본관은 양주. 자는 공거, 호는 만회·만휴·향산·나계. 아버지는 형조판서 계원이며, 아들은 영의정 태구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주서·검열 등을 역임했다. 1667년 왕이 전 해에 정태화·홍명하·허적(許積)을 탄핵한 언관 이숙(李䎘)·박증휘(朴增煇) 등을 유배보내고 이 사실을 사초에 기록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그대로 기록하여 파직당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그후 겸설서·봉교·정언·사서·헌남·이조랑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수원부사에 이어, 황해·강원·경기 3도의 관찰사를 거쳤으며, 이조참판·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뒤 대사헌, 호조·병조 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168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김만중(金萬重)에 의해 희빈 장씨의 어머니와의 오랜 연문이 왕에게 알려졌으나, 오히려 김만중이 처벌되었다.
1688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자신이 동평군 항(杭)의 근척임에도 불구하고, 동평군의 횡포를 논하다가 처벌된 박세채(朴世采)·남구만(南九萬) 등을 극구 변호한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1689년 영돈녕부사에 올랐으며, 기사환국에 형(刑)이 고르지 못함을 상소했다. 1690년 동궁책봉하례에 참가하지 않아, 이듬해 고성에 유배되었고, 2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 죽은 이듬해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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