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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호

다른 표기 언어 趙秉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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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7(헌종 13)
사망 1910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 자는 덕경(德卿). 아버지는 참판 기진(基晉)이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법규교정소의정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거쳐 1881년 8월 수신사로 개항조약의 무관세(無關稅)를 시정하여 새 통상장정을 체결하고 해관세칙(海關稅則)을 협정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이노우에[井上馨]·하나부사[花房義質] 등과 회담했으나 일본측의 불응으로 성과 없이 귀국했다.

1882년 도승지로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의 생사가 불명한 상태에서 대원군이 장례를 강행하자 이에 반대했다. 이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안동부사로 동래민란과 성주민란의 안핵사가 되어 민란을 수습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외무독판이 되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일본망명은 일본의 비호 아래 이루어진 것이므로 속히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그해 12월 도쿄[東京] 주재 러시아 서기관 스페에르와 회담하여 청일양국이 개전할 경우 조선의 중립을 유지하는 방안에 대하여 협의했다.

강화유수·공조판서·예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1892년 2월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인 보은집회가 열리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뒤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장례원경·궁내부특진관·탁지부대신·학부대신·내부대신·의정부의정대신 등을 역임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1899년(광무 3)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으로 신법과 구법을 절충하기 위해 설치된 교전소의정관(校典所議政官)을 지냈다. 시호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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