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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02년(태종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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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87년(성종 18)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나왔다. 1444년 집현전응교로 있으면서 최만리 등과 함께 훈민정음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 투옥되었으나 풀려나왔다가 이듬해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했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1449년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1년 문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정권을 장악하자 사위 김질로부터 성삼문 등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복위계획을 듣고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후 영의정 등을 거치며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하려 할 때 방관하여 죽게 만들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모논의에 참가한 죄로 한명회 등과 함께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본관은 동래. 자는 효중. 아버지는 흠지이고, 형은 좌참찬 갑손이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집현전저작랑·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통감훈의 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다. 1444년 집현전응교로 있으면서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직제학 신석조 등과 함께 훈민정음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파직,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복직되었다. 1445년 집의로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했다가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직예문관이 되고,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수사관을 겸직하고,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1년 문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대사헌·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고,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자 세조의 신료로 활약했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좌익공신 3등, 봉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礩)로부터 하위지(河緯地)·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 일부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복위계획을 듣고,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여 수충경절좌익공신 2등으로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58년 영의정이 되었다.
1462년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상소했다가 삭직당해, 여산에 부처되었으나 곧 부원군에 복작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강순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2등에 올랐다. 70세에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성종이 왕비 윤씨의 비행으로 폐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간하지 않았다. 이후 윤비는 빈(嬪)으로 강등되어 1479년에 사사당했다. 이듬해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비로 책봉할 때 진책정사가 되었으며, 1485년 사직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모논의에 참가한 죄로 한명회·윤필상(尹弼商) 등과 함께 12간(奸)으로 몰려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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