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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일성은 한국영화의 영상미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촬영감독으로 임권택 감독과 다수의 작품을 함께 했다.
대학 졸업 후 미국 공보원에 들어갔다가 미 공군 홍보영화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당시 최고의 촬영기사로 꼽히던 김학성 밑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20대 후반인 1957년 조긍하 감독의 <지상의 비극>을 찍으며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체제와 반체제와의 투쟁이라는 테마를 불교 영화의 형식 속에 담아낸 <파계〉>에서는 신비감이 감도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평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임권택 감독은 <신궁>(1979)을 통해서 만났다.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촬영기사' 대신 '촬영감독'이란 자막을 넣었다. 이후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을 포함해 그가 평생 찍은 영화는 140여 편 정도 된다.
아버지 정재호는 일본대학 설계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건축설계사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5학년인 17세 때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6개월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가나다라'부터 공부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책들을 읽어나갔다.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했으나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어 미국 공보원에 들어갔다가 미 공군 홍보영화를 보고 영화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당시 최고의 촬영기사로 꼽히던 김학성 밑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20대 후반인 1957년 조긍하 감독의 〈지상의 비극〉을 찍으며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홍콩영화의 아류작들이 양산되자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시아문화재단을 통해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1년 동안 공부하면서 대학 선배이기도 했던 김기영 감독과 자주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새로운 영상 기법을 기록했다.
〈화녀〉(1971)를 촬영하며 김기영 감독과 함께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구축해나갔고, 이어 〈파계〉(1974)와 〈이어도〉(1977) 등을 찍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체제와 반체제와의 투쟁이라는 테마를 불교 영화의 형식 속에 담아낸 〈파계〉에서는 신비감이 감도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평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임권택 감독과 만난 것은 1979년에 나온 〈신궁〉을 통해서이다. 이후 직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던 중 임권택 감독이 병원으로 찾아와 〈만다라〉를 함께 만들자고 제의했다. 원작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화면에 담고 싶어 당장 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붕대를 풀기도 전에 임권택 감독과 만나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에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촬영기사' 대신 '촬영감독'이란 자막을 넣었다.
이후 〈장군의 아들〉(1990), 〈개벽〉(1992), 〈서편제〉(1993), 〈춘향뎐〉(2000), 〈취화선〉(2002), 〈천년학〉(2007) 등을 찍으며 한국영화의 영상미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평가를 받았다. 그가 평생 찍은 영화는 140여 편 정도 된다.
제10회 대종상영화제 촬영상(1971),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촬영상(1977), 아시아영화제 촬영상(1978),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촬영상(1981), 하와이국제영화제 촬영상(1987), 제13회 청룡영화상 촬영상(1992),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1993), 제1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2002) 등을 수상하였다.
서울예술대학 강사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를 지냈고, 2011년 현재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1 6월 제10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특별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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