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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휴전의 성립과 강화의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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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와중에서 고니시의 강화제의가 있었고, 1592년 6월 대동강변에서 이덕형과 겐소의 회담이 열린 것을 계기로 휴전교섭이 시작되었으며, 명나라에서도 심유경(沈惟敬)을 일본 진영에 보내 강화를 추진했다.

그 해 8월 평양에서의 강화회담을 한 후 평양 북방에 휴전선을 책정했고, 이후 본격적인 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3월에 열린 용산회담의 결과 일본군은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났고, 포로가 되었던 왕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량을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는 침략을 확대했고, 이순신의 수군을 배후로부터 공격하는 동시에 강화회의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6월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 때 일본군 12만 3,000명의 공격에 대해 김천일·최경회 등 의병·관군 3,000명은 7일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6만 명의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의도 5년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본래 일본의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등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했고, 명은 1596년 사신을 파견해 도요토미를 일본왕으로 책봉하는 책서와 금인을 전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조선 재침략을 기도했다.

한편 휴전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여러 무기와 화약이 발명되고 함선들을 건조했으며, 유성룡을 도제조로 하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즉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살수·사수·포수의 삼수기로 나누어 침략에 대비했다.

수군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세우고 기지의 방비와 포구 간의 연락을 강화했다. 한편 축성 작업도 활발하게 벌어져 남한산성·독산산성·무한산성·죽산산성 등이 새로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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