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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8(연산 4), 전라도 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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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46(명종 1), 중국 영평부(지금의 허베이성 일대)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의 문관.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 호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545년 소윤인 윤원형 일파가 대윤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벌인 을사사화 때에 소윤에 가담하여 숭선군에 봉해졌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병사했다. 시호는 충헌이었으나 사후에 훈작이 삭탈되었다.
조선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순(仁順), 호는 괴마. 아버지는 우형(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원직장·예문관검열·홍문관저작을 지냈다. 1524년 홍문관부교리가 된 뒤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영광군수를 역임했다. 1532년 사헌부로 다시 옮겨 장령·집의를 거쳐 1537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1538년 공조참판·사헌부대사헌·한성부좌윤·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이듬해에는 공조·병조·이조의 참판을 지냈다.
1540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이 되었고, 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42년 한성부의 우윤·좌윤을 지내고,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44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고, 호조판서로 승진했다. 중종 말년 현량과를 다시 두자는 의론이 대두되자 이를 반대했다. 일찍이 윤임(尹任) 등에게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있던 중,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의 대윤을 제거한 을사사화에서 중상과 모략으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을사사화의 공으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우의정을 차함(借銜)하여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베이징(北京)에서 병을 얻어 이듬해 돌아오던 중 영평부(永平府)에서 죽었다. 시호는 처음에 공소(恭昭)라 했으나 문정왕후가 다시 짓게 하여 충헌(忠憲)으로 개시되었다. 1570년(선조 3) 훈작이 삭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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