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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교의 도덕적 심성수양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서, 마음의 작용이 2가지의 서로 다른 성격을 띨 수 있음을 밝힌 인성론(人性論).
〈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순(舜)이 우(禹)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마음을 잘 살펴 하나가 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후 당대(唐代)까지는 유교가 도덕적 심성수양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내용은 주목받지 못하고, 오직 불교적인 심성수양론만이 발달했다. 그러나 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립한 송대(宋代)의 성리학에서는 불교의 심성수양론을 대체할 유교적 이론을 정립해야 했고, 그러한 관심 속에서 이러한 대우모편의 글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인심도심설의 기본내용은 주희(朱熹)가 〈중용〉장구서(章句序)에서 설명했다. 마음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는데, 그 각각을 가리켜 인심과 도심이라고 했다. 인심은 감각적 욕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며, 도심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인심이 위태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감각적 욕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도심이 미묘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도덕적 본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이 인심과 도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나 정일(精一)한 마음자세를 가짐으로써 도심을 잘 살펴서 키워나갈 수 있고 인심이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심성수양의 결과로 중의 상태, 즉 인욕(人欲)의 사(私)를 물리치고 천리(天理)의 공(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적인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도 인심도심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의 인심도심설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5세기초에 이미 권근(權近)은 마음의 작용을 2가지로 나누면서, 마음 속의 성이 발한 것을 정이라 하면서 사단과 도심을 그러한 정에 포함시켰으며, 마음이 발한 것을 의라 하면서 칠정과 인심을 그러한 의에 포함시켰다.
그후 이황(李滉) 역시 "인심은 칠정이요 도심은 사단이다"라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명(名)과 실(實)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은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다만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려 할 때, 인욕은 인심에 속하는 것이며 천리는 도심에 속하는 것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조선 성리학에서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한 이는 이이(李珥)였는데, 그는 성혼(成渾)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명백히 밝혔다. 성혼은 도심과 인심이 각각 성명지정(性命之正)과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발한다는 것은 곧 이와 기에서 발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서 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사단칠정은 마음의 작용 가운데 정(情)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도심인심은 정과 의(意)를 합해서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개념들이 지칭하는 범주가 다르다고 했다.
또 도심과 인심은 서로 받아들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명백히 나누어 설명할 수 있지만,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도심인심과 사단칠정의 관계를 설명하면 사단을 도심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을 인심이라고만 하면 틀린 것이므로 인심과 도심을 합친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도심인심도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가지 길뿐이지만, 사람의 의사(意思)가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따라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우 도심은 오직 천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순선(純善)이지만, 감각적 욕구는 천리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인욕에 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심에는 선 악 모두가 있다고 했다.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땅한 바를 따르면 그 역시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의사가 처음에는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그것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면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으며, 또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한 바를 좇아 사욕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심이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이 인심과 도심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견해를 가리켜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결국 도덕적 수양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을 성의(誠意)에서 찾는다. 도심과 인심이 갈라지고 또 서로 전환하는 것이 모두 의(意)의 작용이기 때문에 정일하는 공부는 결국 천리에 부합하는 의사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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