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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미술에서 조각은 특히 애호된 분야였다.
심지어 건축이나 작은 그림까지도 조각의 특성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인도의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5개의 라타와 같이 암석을 쪼아 만든 건축물의 경우 이러한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한 건축물은 거대한 크기의 조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석조건물은 수많은 조각들로 안팎이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조각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조각과 건축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10세기경부터 더욱 현저해져서 조각은 대부분 건축물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각품은 비록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형상을 갖추었다고 해도 원래 그 조각이 부속되었던 건물의 원 맥락으로부터 따로 떼어서는 그 조각에 부여된 조형적인 의도와 효과, 조각이 전체 속에서 가졌던 의미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인도조각의 소재는 거의 예외없이 종교와 관계된 것들이다.
불교·힌두교·자이나교 및 민속신앙 등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신상과 신화를 도해한 부조 등이 대종을 이룬다. 물론 이러한 조각들을 원래의 종교적 의미를 떠나 단순한 예술품으로서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종교적 내용과 의도를 아는 것이 우리의 감상과 이해를 더욱 진작시킬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5,000년에 걸쳐 발전한 인도조각을 양식적 특징을 일반화하여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대체로 인도조각에 흐르는 2가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생동감 넘치는 조형성의 강조이다. 즉 산치 대탑(제1스투파)의 조각이나 쿠샨 시대 마투라의 조각은 마치 내적 생명력이 안으로부터 충만하여 부풀어오른 듯한 모습으로 유기적·감각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또하나의 흐름은 형태를 안쪽에서부터 성형하기보다 밖에서부터 깎아 들어간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에는 선적인 추상성이 강조된다. 바루트 스투파의 조각들은 그 좋은 예이다.
인도조각사는 이 2가지 흐름의 상호작용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굴된 조각품은 테라코타 소상, 동석제 인장 등 거의 소품들이다. 테라코타 소상들은 대부분 동물이나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것으로 간략하게 성형된 위에 세부가 묘사되었다.
동석제 인장에는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등에 혹이 난 소 등의 동물류이다. 인장조각 중에는 요가 자세로 앉은 인물상과 같이 후대 인도에서 발달하게 되는 종교 전통을 예시해주는 것들도 있다. 이밖에 청동과 돌로 만들어진 소상도 몇 점 전하는데 그 예로 하라파에서 출토한 남자 토르소, 모헨조다로에서 출토한 춤추는 소녀상과 남자흉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조각 유품에는 앞서 이야기한 인도조각의 2가지 흐름이 이미 뚜렷이 병존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 두 흐름이 결합되기도 한다.
건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각에 있어서도 인더스 문명기로부터 BC 3세기의 마우리아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이렇다 할 만한 유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대에 접어들면서 수준높은 석조 조각이 갑자기 출현했다. 이 석조유품들은 아소카 왕이 불법의 홍포를 위해 세운 석주의 주두부를 장식했던 동물상들이다. 이 동물상에 조각된 동물들은 사자가 가장 많고 황소·코끼리 등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소카 왕이 부처의 첫 설법지인 사르나스에 세운 사자 주두이다.
여기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포효하고 있는 4마리의 사자 조각은 절도가 있으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이밖에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토속 남신인 약샤와 여신인 약시의 상들도 여러 점이 있다. 이와 같이 마우리아 시대에 석조 조각이 갑자기 발흥하게 된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부터 유입한 외래 미술가의 역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도미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가들이 이러한 외래의 영향을 자신들의 전통에 맞추어 신속히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인도미술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이래 기원전후까지의 인도조각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괄적으로 보아, ① 바루트·산치·마투라·보드가야 등의 북-중인도 지역, ② 바자·피탈코라·칼리 등 데칸 고원 서부의 지역, ③ 아마라바티·자가야페타 등의 안드라 지방, ④ 오리사를 중심으로 한 동인도 지역 등의 4개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원각상보다는 부조 부문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다. 바루트와 산치의 조각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유품들이다(바루트 조각, 산치 조각).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바루트와 산치의 스투파들은 난순이나 문에 화려하게 조각이 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원형이나 방형의 화면에 부처의 일생이나 전생의 이야기들을 새긴 불전도와 본생도 부조였다.
바루트의 부조는 아직 공간 구성에서 오행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표현도 어색한 점이 있으나, 산치 대탑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극복되어 보다 세련된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 산치 대탑 문의 양측면 까치발에 조각된 약시상은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 감각적인 표정 등에서 생동감 있는 관능미가 넘친다. 이러한 생동감은 다른 지역의 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칼리 석굴 입구의 미투나 상은 그 좋은 예이다.
AD 1~4세기에 걸쳐 인도조각은 북인도의 마투라와 서북인도의 간다라, 남인도의 안드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중에서도 인도의 중원지방에 위치한 마투라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마투라에서 제작된 조상들은 널리 다른 지방에까지 운반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마투라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불상이 비로소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부처는 스투파와 같은 상징물을 통해서 예배되었는데, 1~2세기에 처음으로 불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불상은 마투라와 간다라의 두 지역에서 동시에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초기 불상 중 대표적인 예로 발라라는 승려가 봉헌한 입상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풍만하고 중량감 있으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는 표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기원전에 만들어졌던 석조 약샤 상들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이 조상의 표현 양식이 인도 고유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불상이 처음 만들어졌던 또다른 지역인 간다라 지방은 지금의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걸친 지역으로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이래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간다라 미술). 쿠샨 시대(1~3세기)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는 불교 미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이 미술도 역시 지중해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창조된 불상도 그리스의 신상을 연상하게 하는 서방 자연주의적 형식을 띠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불교의 흥성과 발맞추어 수많은 석조 불상과 보살상들이 만들어졌고, 또 사원의 스투파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불전이나 본생담을 새긴 수많은 부조들이 제작되었다.
4~6세기에 인도의 상당 부분은 굽타라는 통일왕조의 치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인도조각은 소위 고전기를 맞게 되어 새로운 조형적 이상이 확립되었다. 즉 이전의 조각의 주류를 이루던 감각적·현실적인 측면이 줄어들고 표현형식과 종교적 이상 사이에 밀접한 연결이 이루어졌다. 형태는 여전히 내적 생명력에 의해 안으로부터 부풀어오른 듯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현저하게 절도 있고 정리된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점은 고전시대의 절정기였던 5세기 중엽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입상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균정한 몸의 형태와 면밀히 계산된 비례, 규칙적인 옷주름, 숭고한 표정 등은 이 시대의 조형적 이상을 잘 보여준다. 이 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절대적으로 고요하고 안온한 종교적인 분위기이다. 마투라는 여전히 당대 미술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5세기 후반에는 사르나스에 또하나의 유력한 조각유파가 있어서 마투라와는 약간 다른 조형적 이상을 완성했다.
사르나스에서 만들어진 불상들은 약간 긴장을 푼, 콘트라포스토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 몸이나 얼굴의 형태는 마투라 상보다 훨씬 우아하고 부드러워 여성적인 미를 느끼게 한다. 이 유파의 대표적인 작품이 잘 알려진 전법륜불좌상이다.
굽타 시대에는 다양한 힌두신의 도상도 발달하여 많은 신상과 신화를 도해한 부조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비슈누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여 비슈누 상이 여러 모습으로 조각되어 남아 있다. 주목할 만한 예로 중인도의 우다야기리 석굴에 새겨진 〈바라하(돼지) 화현〉 부조와 데오가르 사원의 벽면에 새겨진 〈끝없는 잠에 빠진 비슈누〉 부조를 들 수 있다.
이들 부조에서는 화면 구성이나 인물의 자세에 유연함과 변화가 많고, 전반적으로 약동하는 힘과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7~12세기는 흔히 인도미술사에서 중세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대부분 사원건축에 부속된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제작된 물량도 엄청났다. 그러나 대량제작이 종종 질의 저하를 가져 온 것도 사실이었다. 조각 양식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건축의 경우처럼 북인도와 남인도로 크게 묶어서 파악할 수 있다.
중세 초기의 북인도 조각에는 2가지 흐름이 눈에 띈다.
한 쪽에서는 굽타 시대에 완성된 조형적 규범이 반복적으로 답습되면서 굽타 양식이 타락하고 해체되어갔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모색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자의 흐름은 8세기경 처음 나타나 9세기 후반에 북인도 조각에 괄목한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아한 형태, 풍부한 장식성, 넘치는 리듬감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새로운 양식은 10세기에 절정을 맞이했다. 아바네리의 조각군, 인도르의 시바 사원 조각과 괄리오르의 텔리카만디르 사원 조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선과 각의 강조가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띈다. 12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슬람 세력의 대대적인 침입 속에 북인도의 힌두 조각사는 사실상 끝을 맺게 되었다.
남인도의 중세 조각은, 특히 인물의 경우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며 우아한 운동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아르주나의 고행〉(〈강가의 하강〉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을 묘사한 대암벽 조각에서 그 화려한 시작을 볼 수 있다.
이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가볍고 유연한 특성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안정감과 힘을 얻게 되고, 9세기 후반 촐라 왕조시대의 사원 조각에서 절정기를 맞이했다. 티루발리슈바람·코둠발루르·킬라이유르·슈리니바사날루르·쿰바코남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인도의 조각에도 북인도처럼 평면성과 각의 강조가 점차 나타났다. 한편 촐라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상들은 이 시대의 조각을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춤추는 시바의 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원형의 불꽃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하게 춤을 추는 시바의 모습은 창조와 유지·파괴·휴식이 반복되는 힌두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 이 상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모든 힌두 신상을 대표할 만한 조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인도와 달리 이슬람 세력에 오랫동안 저항했던 남인도지역에서는 힌두 사원의 조각활동이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숙달에도 불구하고 조각들은 대부분 기계적인 반복 속에 생기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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