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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민

다른 표기 언어 李好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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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3(명종 8)
사망 1634(인조 12)
국적 조선, 한국

요약 교서를 잘 지었고, 시에도 뛰어나 전란의 비애를 형상화한 시들을 지었으며, 특히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은 의주로 피난한 왕을 수행하면서 지은 것으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1592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으며,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여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참찬관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 뒤 구신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호민

이호민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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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연안. 자는 효언, 호는 오봉·남곽·수와. 연안군 숙기의 증손이다.

1584년(선조 1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응교·전한·집의 등을 지냈다. 1592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으며, 랴오양[遼陽]에 가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하여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했으며, 참찬관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의 지문을 다시 썼으며, 대제학·좌찬성을 거쳐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연릉군에 봉해졌고, 그뒤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적서의 차별 없이 맏아들을 즉위시켜야 한다는 입장론을 주장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5년 정인홍 등의 원찬론으로 문외출송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 뒤 구신으로 대우를 받았다. 교서를 잘 지었고, 시에도 뛰어나 전란의 비애를 형상화한 시들을 지었고 특히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聞下三道兵進攻漢城〉은 의주로 피난한 왕을 수행하면서 지은 것으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저서에 〈오봉집〉이 있다. 지례 도동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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