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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과 칠레 사이에 일어난 2차례의 중대한 분쟁(1891).
제1차 사건은 1891년 칠레 내란중에, 제2차 사건은 내란 직후에 발생했다. 내란은 칠레 의회와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대통령 간의 갈등으로 촉발되었는데, 해군은 반란 세력인 의회를, 육군은 대통령을 각각 지원했다. 미국 정부는 공공연히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섰다. 무기 부족 사태에 직면한 반군들은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무기 일부를 구입하여 칠레의 선박인 이타타호에 선적했다. 미국 관리들은 무기 구입이 미국의 중립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타타호의 출항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칠레에 도착하자마자 이 배를 미국 해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타타호는 미국으로 후송되었으나 미국 법정은 미국의 중립에 위배된 것은 없으며 배를 억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칠레 반군의 분노를 자아냈으며, 반군이 정권을 장악한 뒤 미국과 칠레의 관계는 오랫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가 미국 순양함 볼티모어호 사건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발마세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군대가 발파라이소 근처에서 2차례 패배한 후 대통령은 1891년 8월 사임하고 아르헨티나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후 칠레 주재 미국 공사는 일부 발마세다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주선했다. 1891년 10월 16일 볼티모어호의 선장이 실수로 부하들에게 발파라이소 상륙을 허가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반미 감정은 극에 달했다. 수병 중 일부가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2명이 살해되고 몇 명은 중상을 입었다. 칠레 정부는 수병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금으로 7만 5,00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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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타타와 볼티모어 사건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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