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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0(고종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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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7 |
국적 | 한말, 한국 |
요약 고종의 큰조카이자 흥선대원군의 손자이다. 1910년 영선군에 봉해지고 육군참장이 되었다.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 한 뒤 정자·형조참의·대사성·직제학·도승지 등을 지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개화파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면에 나서자 이준용의 국왕 옹립이 계획되었으나 개화세력의 반발로 실패했다.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이준용은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895년 3월 권고사직 당한다. 이어 1894년 10월에 있었던 군국기무처 의원 김학우 암살 사건에 연루되고, 이 일로 그는 종신유형 판결을 받게 되지만, 왕명으로 10년으로 감형, 교동부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뒤 풀려난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귀국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극, 호는 석정(石庭)·송정(松亭). 후에 준(俊)으로 개명했다. 할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이고, 아버지는 재면(載冕)이며, 고종의 큰조카이다. 1886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정자·형조참의·대사성·직제학·도승지 등을 지냈다.
같은 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淸)을 견제하려는 한러밀약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친러·친미 정책을 쓰고 있던 고종과 민씨정권을 붕괴시키고 대원군이 집권하게 하기 위해 이준용을 국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개화파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면에 나서자 그의 국왕 옹립이 계획되었다. 내부협판 겸 친군통위사, 이어 내무대신서리로 임명되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했으나 박영효 등 군국기무처 내 개화세력의 반발로 실패하고 내무협판에서 물러났다.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그는 주일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895년 3월 권고사직당하고, 이어 1894년 10월에 있었던 군국기무처 의원 김학우(金鶴羽)의 암살사건에 연루되고, 박영효 등 친일파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종신유형 판결을 받았다. 왕명으로 10년으로 감형되어 교동부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뒤 풀려났다. 1896년 대원군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밀약에 의해 3년간 일본 유학하기로 하고,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갔다. 1897~99년 유럽 각지를 시찰한 뒤 일본 지바 현[千葉縣]에 머물렀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 귀국했다. 1910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육군 참장(參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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