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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다른 표기 언어 李儁 동의어 순칠, 舜七, 일성, 一醒, 해사, 海士
요약 테이블
출생 1859(철종 10), 함남 북청
사망 1907(광무 11), 네덜란드 헤이그
국적 한말, 한국
순칠(舜七)
일성(一醒), 해사(海史), 청하(靑霞), 해옥(海玉)

요약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참석의 길이 막히자 순국했다.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모습

ⓒ Prix / wikipedia | Public Domain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헤이그 밀사사건).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며, 어머니는 청주이씨(淸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양육되었다. 1887년(고종 24) 북청의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고향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장박(張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협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또한 같은 해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가 조직되자,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하다가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운니동에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함경도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그해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에 임해 결국 법부대신과 알력을 빚어 취임 8개월 만에 파직당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하순 극비리에 고종을 만나 세계각국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했다. 그곳에 만국평화회의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1국을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특별시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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