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896, 경북 달성 |
---|---|
사망 | 1930. 6. 10 |
국적 | 한국 |
요약 독립운동가.
본명은 종순(鍾淳). 일명 양건호(梁建浩). 아버지는 석능(錫能)이다.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에서 수학한 뒤 1914년 대구은행에 들어갔다. 출납계 주임으로 있던 중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구영필(具榮泌)·김대지(金大池)를 알게 되어 1917년 12월 은행돈 1만 900원을 꺼내 미국으로 건너가려다가 어렵게 되자 상하이[上海]를 거쳐 만주로 망명했다.
1918년 2월 퉁화 현[通化縣]의 독립군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지린[吉林]으로 가서 그해 11월 10일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 등 12명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전면적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을 창립했다. 상하이로 가서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법을 배워 지린으로 돌아와 동지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같은 해 12월 27일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에 쓴 폭탄의 제조에 참여했다. 1922년 3월 일제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중국 시찰을 위해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총살하기 위하여 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준비했다. 3월 28일 다나카가 탄 배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먼저 오성륜이 배에서 내리는 다나카를 쏘았으나 그 순간 앞으로 다가선 영국인 신혼부인이 맞아 실패했다. 이어 김익상이 차를 타는 다나카에게 권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그쳤고, 다시 이종암이 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자동차 뒤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하여 실패했다. 김익상·오성륜은 체포되었으나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자금사정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1925년 7월 잠입했다. 대구에서 자금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병으로 가출옥한 뒤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