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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60(공민왕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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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25(세종 7)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1419년(세종 1) 원정군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이던 쓰시마 섬을 정벌했다.
조선 건국 후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상장군으로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에 봉해졌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 1417년 좌참찬 등을 거쳐,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가 되었다. 태종이 쓰시마 정벌을 계획하자 삼군도체찰사의 직위에 있던 이종무는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 7,285명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 정벌에 나섰다. 이종무는 섬에 상륙해 왜구의 크고 작은 배 129척과 가호 1,940여 호를 불태웠으며, 적 114급을 베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수백 명을 구출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말 이래 우리나라의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활동이 거의 사라지고,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쓰시마 섬과의 평화적인 통상관계가 지속되었다.
1419년(세종 1) 원정군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이던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했다. 본관은 장수. 1381년(우왕 7)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으며, 이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상장군으로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좌군총제가 되었으며, 장천군으로 개봉되었다. 이후 중군도총제·안주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12년에는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 1417년 좌참찬 등을 거쳐,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가 되었다. 그해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을 했으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의 연평곶에서 포위하는 등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선정부는 왜구가 본거지를 비운 틈을 타 그 뿌리를 뽑고자 쓰시마 섬 정벌을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 삼군도체찰사의 직위에 있던 이종무는 상왕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의 명을 받아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 7,285명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 정벌에 나섰다. 이종무는 섬에 상륙해 왜구의 크고 작은 배 129척과 가호 1,940여 호를 불태웠으며, 적 114급을 베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수백 명을 구출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봉서를 보내 퇴각할 것을 애걸하므로 군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돌아왔는데, 이를 기해동정(일본에서는 강옥전쟁)이라 한다. 이를 계기로 고려말 이래 우리나라의 해안지역을 노략질하던 왜구의 활동이 거의 사라지고,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쓰시마 섬과의 평화적인 통상관계가 지속되었다.
정벌에서 돌아와 찬성사로 승진했으나, 김훈(金訓)·노이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상원에 유배되었다. 1420년 관직이 회복되고, 1421년 부원군에 봉해졌다. 다음해 사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했던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보고하지 않아 1423년 다시 과천에 부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관직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양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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