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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9(명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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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7(선조 40)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아버지는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 평시서직장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형조좌랑·사간원정언·예조정랑·사헌부장령·홍문관부수찬·대사성·형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 개성부유수로 특진되었다. 이때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개성이 함락되자 형 정암(廷馣)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파했다. 장단(長端)·삭녕(朔寧) 등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기호·호남의 길을 행재소로 통하게 했는데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장례원판결사로서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 탈환전에 참가하고, 1594년 고급사로 요동에 다녀왔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비변사당상·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5년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어 군권을 담당했다.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말년 북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이 밀려나자 병을 핑계로 양주로 퇴거했다.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06년 삼척부사로 부임,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평소 이황(李滉)을 흠모하여 호를 지퇴당(知退堂)이라 지을 정도였던 그는 남인인 이원익·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까이 지내며 학문을 연마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와 성력(星曆)·복서 등 잡학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동각잡기 東閣雜記〉·〈황토기사 黃兎記事〉·〈수춘잡기 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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