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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민주운동

다른 표기 언어 二二八民主運動 동의어 2·28 대구 학생의거, 2·28대구학생시위

요약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교생들이 자유당 정권에 대해 항의·시위한 민주화 운동. 당시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민주당 장면 부통령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한 일요일 등교 지시를 거부하여 대구시내 8개 공립 고등학교 학생들이 벌인 반독재 가두 시위를 말한다. 이는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2018년 이날을 기념한 국가 기념일인 ‘2·28 민주운동 기념일'이 제정되었다.

정의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났던 고등학생들의 반독재 민주 운동.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확산되면서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 큰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초기에는 ‘2·28대구학생시위’라고 불렸으며, ‘2·28 대구학생의거’를 거쳐 지금의 명칭으로 공식화되었다.

배경

2·28민주운동의 시대사적 배경은 이미 3연임을 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당시 집권 정당인 자유당의 장기집권 시도에 있었다. 발췌개헌(拔萃改憲)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라는 비민주적 개헌과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던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李起鵬)의 당선을 위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했다.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를 한 달 앞둔 2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자유당 정권은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 유고시 권력을 승계할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부통령 선거에 집중했다. 그러나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張勉)에 대한 지지도가 높음에 따라 장면의 유세활동에 대한 방해 공작이 시작되었다.

발단

일요일이었던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구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정도로 야당 지지도가 높았던 도시였기 때문에 장면의 대구 유세는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 자유당 정권은 장면의 유세에 군중이 모이지 못하도록, 유세 당일인 2월 28일 대구의 각종 기관과 공장에 휴일 근무를, 군부대에는 체육대회를, 각급 학교에는 등교 지시를 내렸다.

전개

자유당 정권은 대구의 경북고·경북대사대부고·경북여고·대구고·대구공고·대구농고·대구여고·대구상고 등 8개 공립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임시수업·시험실시·영화감상 등의 명목으로 등교를 강요했다.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 학생들은 2월 25일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일요일 등교 후에 시위하기로 결의했다.

2.28민주운동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에 의해 펼쳐진 반독재 민주화 시위. 당일 경북고 학생 800여 명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① 민주주의를 살리자, ② 학원의 자유를 달라, ③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 중심가로 행진해나갔다.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CC BY-NC-ND

당일 경북고 학생 800여 명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① 민주주의를 살리자, ② 학원의 자유를 달라, ③ 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 중심가로 행진해나갔다. 대구고 학생들도 포함된 학생 시위대는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했다.

2.28민주운동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대는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 매일신문사를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불의를 규탄했다.

ⓒ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CC BY-NC-ND

경북대사대부고·대구상고 등의 학생들은 교내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거나 학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경북여고·대구여고·대구공고·대구농고 등의 학생들도 수성천변 유세장으로 가거나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확산되자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하고 해산시켰으며, 시위현장에서 약 220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영향과 의미

학생들의 반정부 민주 시위가 벌어지자 대구 지역 언론은 고등학생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2·28대구학생의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마산·대전·부산·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28의 함성은 3·15마산의거를 거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또한 일반 시민들의 주도로 반독재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되었다.

기념일 제정

이후 매년 ‘2·28대구학생의거’의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2016년 제56주년 기념식에서 2·28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추진 범시민 위원회가 출범했고, 2016년 6월 16일 ‘2·28 민주운동 기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18명의 국회의원의 공동발의로 발의되었다. 이어 ‘2·28 민주운동 기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2017년 9월 28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했으며, 2018년 1월 30일 국무회의의 심의·의결이 있었고 2월 6일 관보에 게재됨으로써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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