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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관

다른 표기 언어 李殷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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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7. 11. 27, 강원 이천
사망 2014. 3. 12,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이자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 21세 때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본래의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에서 무대예술화되면서 민요조가 강해졌고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1984년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이다. 1917년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나 1931년 철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 〈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

〈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 〈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 〈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신불출 만담일행'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41~45년에는 무대생활을 했다. 1946년에 대한국악원에 입단했고 '민요국극단'을 조직·운영했는데 이때 주로 〈배뱅이굿〉을 공연했다. 1968년 국악협회 간사를 맡았고 같은 해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고 학원장으로 취임했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를 맡았으며 1984년 10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김경렬·김경선 형제에게 전수했다.

원래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가 많았는데, 그의 〈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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