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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 6. 10,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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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7. 10. 27 |
국적 | 한국 |
요약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일본 고쿠가쿠인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뒤 1919년 귀국, 오산학교 등에서 교사를 지냈다. 1923년 만주로 망명한 후 1926년부터 중국 펑위샹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참모로 활동했고 이 부대가 장제스의 부대로 통합되자 국민정규군 소장이 되었다. 중국군으로 근무하면서도 김구·김규식 등과 연계를 갖고 임시정부를 도왔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 육군참모학교 교관이 되었고 1939년엔 이건우·김인과 함께 〈청년호성〉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이듬해 화중군사령부의 고급막료로 난징·한커우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중국군 중장으로 화북지방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했다가 1947년 귀국한 후 뇌일혈로 죽었다. 시·서·화에 능했고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
본관은 월성(月城). 일명 연호(然皓)·직(直).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 아버지는 시우(時雨)이고, 동생은 상화(相和:尙火)·상백(相佰)이다.
큰아버지인 일우(一雨)가 경영하던 강의원(講義院)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를 졸업하고 미술학교·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경신·계성·신명 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교포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1926년부터 동만주에 있는 중국 펑위샹[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참모로 활동했으며, 이 부대가 장제스[蔣介石]의 부대로 통합되자 국민정규군 소장이 되었다. 중국군으로 근무하면서도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과 연계를 갖고 임시정부를 도왔다.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重慶] 육군참모학교 교관이 되었다. 1938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있으면서 유동열(柳東說) 등과 신한민주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을 지냈고, 1939년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한 후 이건우(李健宇)·김인(金仁)과 함께 〈청년호성〉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이듬해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南京]·한커우[漢口]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1942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안을 제안했으며, 임시정부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연구위원이 되었다. 1945년 2월 홍진(洪震)·유동열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중국군 중장으로 화북지방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하다가 사퇴하고, 상하이[上海]로 가서 교포들의 보호에 힘썼으나 1947년 귀국한 후 뇌일혈로 죽었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했고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저서로 〈산은유고〉·〈표박기 飄泊記〉가 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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