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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9. 5. 15, 충남 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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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 6. 28 |
국적 | 한국 |
요약 독립운동가.
본관은 덕수. 일명 일영·봉기. 자는 공익, 호는 송강.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천안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혔다가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남만주 신흥무관학교를 7기생으로 졸업한 후 한국독립연성대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공헌했다.
1921년 관내로 들어가 제1·2봉직전쟁에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활약했다. 자유시를 거쳐 이르쿠츠크로 가서 고려혁명군에 관계하다가 자유시참변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에서 김규식(金奎植)·고평·이범석(李範奭) 등이 고려혁명군을 편성할 때 참여하여, 동북만주 미산[密山]·후린[虎林]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군을 격파하는 등 무장항일활동을 했다.
1925년 닝안[寧安]에서 김좌진(金佐鎭)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를 조직할 때 참가하여 경비대장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17인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 무정부주의자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하여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 김좌진을 주석으로 추대할 때 군사위원장이 되어 동북만주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당원 김봉환(金奉煥:일명 一星)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朴尙實:일명 尙範)에게 피살되자, 그가 중심이 되어 임시치안대를 조직하고 중동선 일대를 방위하는 한편, 중국 치안당국과 연락, 해림역 부근의 공산당 근거지를 급습하여 김봉환을 체포·처단했다.
1932년 한족총연합회 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이 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재만한인들의 배일사상 고취와 생활선도에 힘을 기울였다. 1944년 9월 한국광복군을 설치할 때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8·15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의 최용덕(崔用德)·김학규(金學奎)·김관오(金冠五)·장흥·권준·박시창(朴始昌) 등과 함께 중국군 및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장병을 흡수하여 베이징·난징[南京]·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 등지에서 훈련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오광선과 함께 국내지대를 따로 설치하고 참모장에 취임하여 활약했다.
이후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사찰부장이 되었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49년 제주도병사구사령관을 역임하고 방위군옹진지단 고문관으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 때 전사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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