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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752경, 아테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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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803. 8. 9, 레스보스 |
국적 | 비잔틴 |
요약
비잔티움 황제 레온 4세의 아내로서 780년 9월 남편이 죽자 10세 된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보호자로서 아들과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730년 성화상 사용을 부활시키는 데 찬성한 이리니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1차례의 시도를 분쇄하고서, 군대에게 자신을 선임 군주로 인정하는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소아시아 여러 지방들의 저항에 의해 황궁에서 쫓겨났다. 792년 1월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는 두 눈을 뽑히는 처벌을 받았다. 이후 유일한 황제가 된 그녀는 5년 동안 다스렸으나 802년 대신들과 장군들이 음모에 의해 폐위되었다.
동로마 제국에 성화상 사용을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비잔티움 황제 레온 4세의 아내로서, 780년 9월 남편이 죽자 10세 된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보호자로서 아들과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그 해에 레온의 이복 형제 니키포로스를 권좌에 앉히려던 음모를 분쇄했다.
이 음모는 성화상파괴론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성화상파괴논쟁). 이리니는 730년에 금지되었던 성화상 사용을 부활시키는 데 찬성했다. 자신의 지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타라시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한 뒤 성화상 사용 문제를 놓고 전교회의 총공의회를 소집했다. 7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나, 그 도시에 배치되어 있던 성화상파괴파 군인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787년 니케아에서 다시 공의회가 소집되어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켰는데, 이 공의회는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 의해 제7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머니가 제국을 좌우하는 것이 싫어졌다. 이리니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1차례의 시도를 분쇄하고서, 군대에게 자신을 선임 군주로 인정하는 충성 서약을 하도록 요구했다.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들은 이 요구에 분개하여 790년 공식적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이들은 콘스탄티노스 6세를 유일한 군주로 선언하고, 그의 어머니를 황궁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792년 1월 이리니는 황궁으로 돌아왔고 공동 군주의 지위에 다시 올라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주교들과 궁정인들을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하여 콘스탄티노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결과 콘스탄티노스는 어머니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두 눈을 뽑히는 처벌을 받았다(797).
이리니는 그뒤 유일한 황제(황후가 아닌)가 되어 5년 동안 다스렸다. 798년 서방 황제 샤를마뉴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802년에는 그녀와 샤를마뉴의 혼인 계획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비잔티움 사가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이 계획은 이리니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802년 대신들과 장군들이 음모를 꾸며 이리니를 폐위시키고 재무대신 니키포로스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이리니는 처음에는 프린키포(지금의 뷔위카다)로, 다음에는 레스보스로 유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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