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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6(정조 10), 전남 무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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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66(고종 3)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후기의 승려.
속성은 장씨. 자는 중부, 호는 초의. 15세에 나주군 남평 운흥사 벽봉민성에게 출가했다. 19세에 해남 대흥사 완호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삼장을 수학했다. 21세에 대교를 졸업했다. 그후 화순 쌍봉사로 옮겨 금담으로부터 선을 배우고 토굴에 들어가 참선에 전념했다.
24세에 대흥사로 돌아와 연담으로부터 초의라는 호를 받았다. 일찍이 24세 연상인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신지도로 유배오자 그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웠다. 한양에서는 신위(申緯)·홍석주(洪奭周)·홍현주·정학연·신관호·윤치영 등 많은 인사들과 교유했으며, 특히 동년배인 김정희(金正喜)와는 교분이 두터워 김정희가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을 때는 5번이나 위문했고, 의순의 초상화는 김정희의 제자가 그려주었다. 1815년 처음으로 금강산·지리산·한라산 등지를 유람하다가 1817년(순조 17) 경주 불국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1826년에 대흥사 뒤쪽에 일지암을 짓고 이곳에서 홀로 40여 년 간을 수행에 전력했다. 1856년(철종 7) 김정희가 죽자 2년 후 과천까지 가서 조문하고 돌아와 그후 일지암에 머물며 두문불출하다가 1866년 8월에 입적했다.
의순은 승려로서 범패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원예나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문인적인 취향이 짙었다. 그의 일상생활은 선과 시와 차(茶)가 집약된 모습이었다. 당시 백파가 〈선문수경 禪文手鏡〉에서 선을 선승의 근기에 따라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3등급으로 나누고, 여기에 맞추어 선종의 8개 종파를 분류했는데, 의순은 〈선문사변만어 禪門四辨漫語〉에서 이것을 비판했다.
그는 설법의 주체에 따라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나누고, 다시 설법의 내용에 따라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나눈 다음, 조사선이 격외선이며 여래선이 의리선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선을 둘러싼 의순과 백파의 논쟁은 침체되어 있던 조선 후기의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김정희 등의 실학자들에게도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선 수행에서의 깨달음을 시문을 통하여 표현했는데, 그의 시와 글은 이미 당시에 정결하고 간명하며 세속적인 분위기를 초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그는 선수행과 차를 마시는 것을 일치시켜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깨달음의 기쁨을 느끼고자 했다.
차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동다송 東茶頌〉·〈다신전 茶神傳〉을 지었으며, 후대에 다성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정약용과 함께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도). 저서로는 〈선문사변만어〉 1권, 〈이선래의 二禪來儀〉 1권, 〈진묵조사유적고 震默祖師遺蹟考〉 1권, 〈초의시고 草衣詩藁〉 2권, 〈동다송〉 1권, 〈다신전〉 1권 등이 있으며, 〈대둔사지 大芚寺誌〉를 편집했다. 의순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자가 40여 명이고 보살계를 받은 자는 70여 명이나 되며, 선교잡공을 받은 자가 수백 명이 되었다. 제자로는 선기와 범운 등이 있고, 신헌이 탑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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