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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3·1운동

다른 표기 언어 義城三一運動

요약 1919년 3·1운동 당시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3월 12일을 발단으로 4월 초까지 진행되었다. 기독교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중 주동자들은 교장실로 불려가거나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총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에 가담했으며, 일본 경찰에 의해 9명의 부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의성군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발로 안평·봉양·장곡·신명·춘산면에서 4월초까지 전개되었다.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김원휘(金原輝)가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귀향하여 3월 6일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朴永達)을 만나 서울·평양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촉구하고, 이튿날 안평면 괴산동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에게 평양의 상황을 알리고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할 것을 상의했다.

그리고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3.1운동을 목격한 뒤 3월 10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대구 계성고등학교 학생인 박상동(朴尙東:박영화의 아들)·박영신(朴永新)·배달근(裵達根)·배중엽(裵重曄) 등 기독교 청년들이 가담, 이들과 함께 3월 12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한편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우희원(禹熙元) 등은 3월 11일 비안장날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2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3월 12일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4명의 주동자들이 교장실로 불려가자, 150여 명의 학생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출동한 일본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주동학생은 체포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 기독교인들은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여 장을 제작해, 정오에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 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3일과 16일에도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金石根) 등의 주동으로 약 1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러한 시위소식이 박영화를 통해 안편면 대사동교회에 전달되자, 김옥돈(金玉頓) 등 대사동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3월 15일~19일에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대사동교회 집사였던 이양준(李良俊)이 3월 19일 도리원 장날을 기해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도리원 장터로 행진했다. 여기에 대사동의 해산군중도 가담하여 시위군중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으며, 다수의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점곡면에서는 16~20일,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3월 25일에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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