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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백남

다른 표기 언어 尹白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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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 10. 4, 충남 공주
사망 1954
국적 한국

요약 개척기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꼽힌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고 있는 〈월하의 맹세〉라는 저축계몽영화를 감독하면서 영화활동을 시작했고, 부산에서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2번째 영화 〈운영전〉의 감독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1902년 경성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와세다 실업학교를 거쳐 관비유학생으로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했다. 〈매일신보〉 기자가 된 후 극단 문수성에 참여해 연극활동을 했다.
1919년 〈동아일보〉 기자로 자리를 옮긴 후 본격적인 문필활동과 함께 1922년 민중극단을 창단했다. 1925년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심청전〉·〈개척자〉를 제작했다. 문예영화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화연구와 신인교육을 시도했으며, 8·15해방과 함께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서라벌예술대학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영화의 재건과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명은 교중. 개척기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꼽힌다. 1902년 경성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 와세다 실업학교[早稻田實業學校]를 거쳐 관비유학생으로 와세다대학 정경과(政經科)에 진학했다. 그러나 조선침략을 획책하던 일본이 세운 조선통감부의 방해로 수업이 중단되었고, 도쿄 고등상업학교로 이적했다가 1909년에 귀국했다.

식산은행의 전신인 한성수형조합의 간부로 잠시 재직하다가 〈매일신보〉 기자가 된 후 극단 문수성(文秀星)에 참여해 연극활동을 했다. 1919년 〈동아일보〉 기자로 자리를 옮긴 후 본격적인 문필활동과 함께 1922년 민중극단을 창단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의뢰를 받아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고 있는 〈월하의 맹세〉라는 저축계몽영화를 감독하면서 영화활동을 시작했고, 부산에서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2번째 영화 〈운영전〉의 감독을 맡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1925년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심청전〉·〈개척자〉를 제작했으나 흥행부진으로 영화사는 곧 해체되었다. 1928년 이기세·김을한·안종화·염상섭 등과 함께 문예영화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화연구와 신인교육을 시도했으며, 1930년 동아일보사가 창간 1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영화 〈정의는 이긴다〉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1934년 만주로 건너가 영화인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한 채 소설집필에만 몰두해 〈낙조의 노래〉·〈야화〉 등의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8·15해방과 함께 귀국한 윤백남은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서라벌예술대학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영화의 재건과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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