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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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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33(중종 28)
사망 1601(선조 34)
국적 조선, 한국

요약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에 올랐다. 평양에 있을 때 명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했으며, 함흥피난론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선조가 무사하게 했다.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문징명체에 일가를 이루었다.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을 거쳐 1587년 전라도관찰사, 1589년 평안감사를 지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지냈다.

윤두수

윤두수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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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해평.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변(忭)이며, 동생이 우찬성 근수(根壽)이다. 성수침(成守琛)·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저작 등을 지냈다.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으로 권세를 누리던 이조판서 이량(李樑)이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이량이 반대파 사림의 숙청을 꾀하다가 유배됨에 따라 다시 기용되어 수찬이 되었다. 그뒤 이조참의·장령·사복시정·부응교·우승지 등을 지냈고, 1576년(선조 9) 대사간이 되었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도승지로 있다가 이종동생 이수(李銖)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1579년 연안부사로 복직되었다. 이때 구황의 공으로 선조로부터 옷 1벌을 상으로 받았다. 이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을 거쳐 1587년 전라도관찰사, 1589년 평안감사를 지냈다.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에 해원군(海原君)으로 봉해졌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지냈다. 1591년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를 당할 때 함께 파직되어 회령·홍원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기용되어 선조를 호종(扈從),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평양에서 좌의정에 올랐다. 평양에 있을 때 명나라에 대한 원병 요청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했으며, 함흥피난론을 물리치고 의주행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선조가 무사하게 했다. 의주에서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랴오둥[遼東] 피난을 막았다.

1594년 세자를 따라 남하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왕비를 해주로 시종하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9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문징명체에 일가를 이루었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梧陰遺稿〉·〈성인록 成仁錄〉, 편서로는 〈기자지 箕子志〉·〈평양지 平壤志〉·〈연안지 延安志〉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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