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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17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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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02경 |
국적 | 투르노보 |
요약 투르노보(지금의 소피아 근처)의 총대주교, 수도원 학자, 언어학자.
그의 광범위한 문필 활동은 중세 후기 불가리아에서 문예부흥의 선구가 되었으며, 동유럽 정교회의 신학적·법률적 기초를 놓았다.
불가리아 태생의 유티미우스는 불가리아의 킬리파레보(지금의 부르가스 근처)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테오도시우스의 수제자가 되었다. 또한 그를 계승해 비잔틴의 관상기도 운동인 헤시카슴의 대변자가 되었다. 이런 특성을 지닌 유티미우스는 콘스탄티노플과 아토스 산의 여러 수도원 공동체를 여행하며 금욕훈련을 했으며, 그리스-슬라브의 문화적 환경에서 필사본 서기와 작가로서 활동했다.
1371년경 불가리아로 돌아와 1375년 투르노보의 총대주교 겸 불가리아 정교회의 수석주교로 선출되었으나 1393년 투르크인이 투르노보를 함락시킴으로써 추방당했다.
총대주교로 있으면서 유티미우스는 정교회의 전례서와 법전을 공식적인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개정한 일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저술했는데, 이로써 특별한 문화적·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일관되고 체계적인 언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다. 9세기 그리스 사도들에 의해 슬라브족인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에게 전해진 슬라브 유산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원래 단일어인 슬라브어는 별개의 언어들과 방언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사용하던 슬라브어는 9세기 언어의 문법적·구문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다양한 슬라브 관용어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죽은 언어가 되었다. 더욱이 성서본문과 전례서들은 일련의 개정을 통해 모호하게 되었으며, 이단 분파(주로 마귀가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이원론적인 보고밀파)가 확산되었다.
유티미우스는 대중의 도덕성과 신학적 정통성은 기본적으로 성서의 정확성과 문학적 자질에 관련되어 있다는 확신에 따라 개혁을 실시했다. 키릴루스의 문법과 문어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그리스의 수사체 및 강조체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적인 고대 슬라브어를 수정했다. 그런 언어 수단으로 인해 비잔틴의 교회·문화·정치적 유산의 계승자로서 슬라브족의 운명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유티미우스는 자신의 헤시카슴 전통을 사용하여 수도원 문화를 신학과 문학 개혁을 위한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 의식 및 교리에 있어서 비잔틴 보수주의를 강조했고, 종교체험에서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묘사했다. 더욱이 헤시카슴 양식에서 정교회의 주요성인들과 초기 교부들의 극적인 전기에 신학사상을 엮어넣음으로써 그것을 올바른 교리와 금욕주의를 전파하는 매개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불가리아 수도원 중심지인 파로리아 및 킬리파레보, 수사 선교사들, 슬라브 및 그리스 망명 학자들은 유티미우스의 개혁운동을 동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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