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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4(중종 39), 경남 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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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0(광해군 2)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불교승려였지만 승병장이나 외교가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1559년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고 3년 뒤 승과에 합격했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보현사로 휴정을 찾아가 수행에 정진했고,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에 머물렀다.
의승도대장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어 1605년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1610년 8월 입적했다.
본관은 풍천(豊川).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峰). 아버지는 수성(守成)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무렵부터 할아버지에게 〈사략 史略〉을 배웠으며, 13세에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에게서 〈전등록 傳燈錄〉을 배웠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많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20세 연상인 박순(朴淳) 및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자주 토론하며 가까이 지냈다.
또 당시 재상이던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장자〉·〈문자 文子〉·〈열자 列子〉 및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거쳐, 1575년(선조 8)에 선종 승려의 여론에 의해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1578년에 휴정에게 하직하고 보덕사(普德寺)로 가서 3년간 머문 후 1581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진리를 깨닫고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당했다가, 강릉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기응변으로 인근 9개 촌락의 백성을 구출했으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그해 3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4차례 협상회담에 참여했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고 한다.
묘향산으로 가서 휴정의 영정을 참배한 다음 원주 치악산에 머물렀다. 그후 병이 들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던 중 1610년 8월에 입적했다.
그는 휴정의 4대 제자의 하나였지만, 불교승려로서의 독창적이며 체계화된 사상은 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병장(僧兵將)이나 외교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부국강병책을 건의하여 중농정책의 실시, 인물본위의 관리채용, 탐관오리 숙청, 민력(民力)의 무장, 산성축조, 무기제조, 군량미 비축 등을 강조했다.
특히 불교억압책으로 인하여 몰락한 승려의 사회적 신분을 일반민과 같이 해줄 것을 건의했다. 임진왜란중에 이미 가토와 4차례의 회담을 가진 바 있는 그는 난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성공적인 강화를 맺고 귀국했으며, 입적하기 직전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에게 우호를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시문에 능하여 저술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때 거의 불타버렸고, 〈사명대사집 四溟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 奮忠紓難錄〉 1권, 기타 상소문·발문(跋文)·서장(書狀) 등이 전한다.
문도들이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탑과 비를 세웠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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