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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4(명종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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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흥. 자는 연숙, 호는 취흘. 아버지는 부정 몽표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608년 사가독서를 한 후 광해군 집권기에 사서·수찬·응교·장악원정·종부시정·부제학·대사간·형조참판 등을 지냈고, 영주군에 봉해졌다.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예조에서 그의 죽음을 딸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통고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자 "김제남은 반역을 꾀한 우두머리로 국법에 의해 죽음을 내렸으니 예조에서 절대로 대비에게 부고를 하고 상복을 올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1616년 인목대비를 폐하라고 적극 주장하고, 폐비를 반대한 신흠·한준겸(韓浚謙)·박동량 등을 귀양보낼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심복이었다고 하여 처형이 논의되었으나 경상도 청하에 위리안치되었다. 고산의 삼현영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흘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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