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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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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342경 |
국적 | 동방교회 |
요약 4세기 동방교회의 중요한 주교.
아리우스주의(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교리)의 핵심적인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결국 유세비우스파라 불리는 아리우스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안티오크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이며 아리우스주의의 창시자인 아리우스를 만나 순교자 성 루키아누스의 지도 아래 동문수학했다. 유세비우스는 그후 베리투스의 주교가 되었으며, 318년경에는 니코메디아의 주교가 되었다.
323년 8월 아리우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주교 알렉산데르가 조사하자 유세비우스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청했다. 아리우스를 돕기 위해 유세비우스는 다른 주교들에게 호소했다.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23. 9)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유세비우스는 그를 변호하며 비티니아 교회회의(323. 10)를 후원했는데, 이 교회회의는 아리우스에 대한 파문을 무효화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n)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열렸을 때 그는 동일본질파(Homoousians)에 대항하는 반대파를 이끌었고, 공의회가 마침내 그들이 내세운 조항을 받아들였을 때에야 그 신조에 서명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한 파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리우스가 정말 파문서의 내용대로 주장했는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공의회 직후 그는 아리우스와 다시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유세비우스가 328년 신앙고백서를 제출할 때까지 갈리아로 추방했다.
황제의 누이동생인 콘스탄티아와 맺은 친교 덕택에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말년에 아리우스주의가 강력한 반발을 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가 동일본질파 지도자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힌 끝에 335년 티레의 교회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를 면직·유배하고 그 대신같은 해 예루살렘 교회회의에서 아리우스를 복권시켰다.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이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계승된 덕을 톡톡히 보았으며, 339년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어 341년 안티오크 교회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는 '동일본질' 조항을 생략한 신조가 채택되었다. 그는 이 교회회의 직후 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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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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