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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북동부, 와이오밍 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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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40,806명 (2017 추계) |
면적 | 18.93㎢ |
대륙 | 북아메리카 |
국가 | 미국 |
요약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북동부 루전 군의 군청소재지(1786)이며 시.
와이오밍 계곡에 자리잡은 도시로 스크랜턴 남서쪽 29㎞ 지점, 서스쿼해나 강가에 있다. 약 30개의 인접 지방자치체를 포함하는 대도시 지구의 중심부이다.
1769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 당시 활약했던 존 더키 소령이 서스쿼해나사(社)의 인가를 얻어 일단의 코네티컷 식민지 주민을 와이오밍 계곡에 정착시킴으로써 영구정착이 이루어졌다. 더키 소령은 영국의 정치가로서 의회에서 미국 식민지의 입장을 옹호했던 존 윌크스와 아이작 배리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만들었다.
시는 역사상 2번의 큰 존립 위기를 겪었다. 그것은 펜실베이니아 개척민과 코네티컷 개척민들이 경쟁지의 영토권을 놓고 벌인 페너마이트-양키 전쟁(1769~84) 때와, 독립전쟁 당시 토리 당원과 이로쿼이 인디언 사이에 발생했던 분쟁으로 1778년 7월 3일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해 갈등이 절정에 달한 와이오밍 대학살 때였다.
1779년 존 설리번 장군이 이끄는 이로쿼이 인디언 토벌대가 이곳에서 결성되었다. 그밖에도 개척민들 사이의 분쟁이 계속되면서 잇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지만 1805년경 코네티컷 주가 모든 소유권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영토분쟁은 일단락되었다.
19세기초 석탄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교통이 발달하고 유럽 이주민이 들어오는 등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석탄산업이 쇠퇴하고, 신발·연필·유리·보일러·가구·장난감·강철구조물·비행기부품·전자장비 등의 제조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업이 발달해왔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윌크스대학(1933), 킹스대학(1946), 미저리코디아대학(1924)과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1916)의 윌크스배리 분교 등이 있다. 와이오밍 대학살이 벌어졌던 곳과 윌크스배리 요새, 포티 포트에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리는 명판이 있다.
하비 호 휴양지와 포코노 산 휴양지가 가까이 있다. 1972년 서스쿼해나 강이 범람해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었다. 1806년 자치시, 1871년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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