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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휴즈 윌슨

다른 표기 언어 윌슨 , Sir Henry Hughes Baronet, Wi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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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4. 5. 5, 아일랜드 롱퍼드 에지워스타운 근처
사망 1922. 6. 22,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육군원수, 대영제국 참모총장.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의 주요군사고문이었다. 군사 작전책임자로서 육군부에 근무하는 동안(1910~14), 그는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했으나, 이 정책은 많은 영국 지도자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1880년대초에 군인이 되어 서리 캠벌리에 있는 참모대학의 교장으로 승진했다(1907~10). 이 시기에 프랑스의 육군대학 교장 페르디낭 포슈 장군(뒤에 원수)과 친교를 맺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윌슨이 프랑스 전략을 쉽게 받아들인 점이 설명될 수도 있다. 코러클배 사건(1914. 3) 때는 아일랜드 자치법에 반대하는 얼스터 지방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한 군대 출동을 거부했던 일부 영국군 장교들을 은밀히 부추김으로써 의심쩍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을 공격해야 한다는 총사령관 육군원수 로버츠 백작의 전략 대신 프랑스 군대와 제휴하여 프랑스에서 싸운다는 윌슨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윌슨은 징병제(1916년까지 제도화되지 않았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로버츠와 의견을 같이했다. 상비군의 순조로운 동원과 1914년 8월 프랑스로의 신속한 이동은 주로 윌슨의 전전(戰前) 계획 덕택이었다.

윌슨 역시 참모차장으로서 곧 프랑스로 갔다. 전쟁에서 그의 유일한 야전 지휘(1915. 12~1916. 12)는 그의 제4군단이 아라스 근처 비미리지 작전지역을 독일군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끝났다. 1917년 9월 동부방면군 지휘를 맡음으로써 런던에 살 수 있게 되었고 로이드 조지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대영제국의 참모총장(1918. 2 .18~)으로 총리에 조언하여 포슈장군이 서부전선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도록 힘썼다.

윌슨은 원수로 승진하고 준남작이 되었으나(1919), 정부의 전후 아일랜드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로이드 조지는 그를 참모총장으로 재임명하지 않았다. 그뒤 군대를 떠나 얼스터 선거구에서 보수당 의원으로 하원에 진출했다(1922. 2). 윌슨은 매력적인 성격과 능란한 연설가로서 영국-아일랜드 연합주의를 대변함으로써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미움을 샀으며 혁명적인 아일랜드 공화군 군인 2명에 의해 자신의 집 현관 계단에서 암살당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준남작작위는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었다.

소장 C. E. 콜월 경이 쓴 윌슨의 전기 〈육군원수 헨리 윌슨 경 Field-Marshal Sir Henry Wilson〉(2권, 1927)은 윌슨의 일기를 발췌하여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잘못된 군사이념에 대한 극단적 비난이 들어 있어서 그의 직업적 명성을 손상시키기도 했다. 보다 최근의 전기로는 베질 콜리어가 쓴 〈육군참모장교 Brasshat〉(196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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