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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3. 5. 9, 잉글랜드 도싯 치디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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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1. 7. 20, 도싯 브리드포트 |
국적 | 뉴질랜드 |
요약 뉴질랜드의 정치가.
1864~65년 총리를 역임했으며 뉴질랜드의 '자주정책'을 추진했다. 즉 영국식민지는 영국정부의 도움없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마오리족에 관한 모든 사안에 대해서도 식민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스토니허스트와 스위스 프리부르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1843년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목양업을 시작했다. 1851년 그는 영국을 몇 차례 여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뉴질랜드에서 목양업자가 되는 방법 Hints to Intending Sheep Farmers in New Zealand〉이라는 팜플렛을 출간했다.
웰링턴 이주민제헌협회에 참여하면서 정치계에 입문한 그는 조지 그레이 경이 새로운 헌법안을 선포한 직후인 1853년 와이라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총회 첫 회기에 비공식 집행자문위원이 되어 식민지정부가 대의제 정부(1856)로 원활히 이행해가는 데 일조를 담당했다. 즉 그는 식민지 총독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의 신임을 얻은 장관들과의 상의를 통해서만 국내문제를 처리하는 정부체제의 형성을 주장했다. 1860년 스태퍼드 내각에서 원주민 문제 담당 장관을 역임했으며, 그 다음의 두 정부가 마오리족과의 평화협상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의회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오리족의 사안(事安)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정부의 더이상의 개입, 특히 군사적 개입을 막기 위하여, 그레이 총독은 1864년 웰드에게 내각을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다음해 영국 군대는 뉴질랜드에서 철수했고 마오리 지역의 광대한 토지는 새롭게 통과된 원주민 토지법안에 따라 몰수되어 유럽인 정착민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부 청사를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이전한 것에 대한 정부 내의 논란과 자주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대 여론 확산, 그리고 자신의 건강 약화로 1865년 사임했으며,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이듬해인 1867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1868년 마오리족과의 분쟁이 재개되자 뉴질랜드로 돌아와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대신에 서오스트레일리아의 총독(1869~75)이 되어 중요한 정치개혁과 교육개혁을 실시했고, 식민지에서는 처음으로 철도·전보·증기선(蒸氣船)의 개발을 원조했다. 후에 태즈메이니아의 총독(1875~80)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주로 분파적인 지역정부의 반목과 적대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880년 기사 작위를 받은 그는 스트레이트 정착지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현지의 토착지배계급과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했으며 1887년에는 보르네오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말레이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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