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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미국의 언론인이자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공인'으로 알려진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선구자.
본명은 Walter Leland Cronkite, Jr.
그는 〈월터 크롱카이트의 CBS 이브닝 뉴스 CBS Evening News with Walter Cronkite〉(1962~81)의 장수 앵커였고, 20세기 후반 최고의 역사적인 사건 다수를 보도한 주역이었다.
소년 시절 크롱카이트는 책, 잡지, 신문의 열렬한 독자였다. 1927년에 그는 가족과 함께 휴스턴으로 이사했고, 거기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학교 신문사에서 활동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휴스턴 신문사의 파트타임 통신원으로 일했다. 1935년 그는 휴스턴 신문사에서 정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대학을 떠났다.
1939년 크롱카이트는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전신인 UP(United Press)의 뉴스 편집자가 되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UP는 크롱카이트를 종군기자로 승진시켰다. 그에게는 북대서양 전선을 담당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얼마 후 그는 런던으로 다시 발령받았고, 거기에서 도시에 가해지는 독일의 폭탄 공습을 보도했다. 크롱카이트는 또한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보도를 담당했다.
그는 공습 중인 독일 상공으로 날아가서 1944년 D-데이에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이루어졌던 연합군 상륙 작전을 보도했다. 종전 후 그는 유럽에 남아서 뉘른베르크 재판을 취재했고, 수많은 UP 지국 설립을 도왔다.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모스크바 UP지국의 초대지국장(1946~48)을 역임했다.
크롱카이트는 컬럼비아방송사(Columbia Broadcasting System/CBS)사의 부사장인 에드워드 R. 머로의 주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1950년에 워싱턴D.C.에 있는 CBS 텔레비전 계열사에 그를 특파원으로 채용했다. 1950년대에 줄곧 크롱카이트는 CBS의 〈유 아 데어 You Are There〉, 〈모닝 쇼 The Morning Show〉, 〈20세기 The Twentieth Century〉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유 아 데어〉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가상의 방송이었고, 〈모닝 쇼〉에서 그는 찰리 마그네라고 불리는 인형과 공동 진행을 맡았다. 〈20세기〉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였다.
크롱카이트는 처음에는 미디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을 해나가면서 텔레비전 뉴스의 형식을 갖추는 일을 거들었다.
그는 즉석에서 말하는 데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의 능력은 정치 뉴스 쇼 〈맨 오브 더 위크 Man of the Week〉(1952~53)와 속보를 담당하는 데 적격이었다. 그는 이런 능력을 발휘하여 1952, 1956, 1960년에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보도했다.
1962년 그는 크롱카이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CBS 이브닝 뉴스 CBS Evening News〉의 앵커 자리에 올랐다. 크롱카이트가 선임자 더글러스 에드워즈로부터 프로그램을 물려받고 얼마 되지 않아, 15분짜리 방송을 30분으로 늘렸다. 이로써 미국 전역에 매일 밤 방송되는 30분짜리 텔레비전 뉴스가 만들어졌다.
〈월터 크롱카이트의 CBS 이브닝 뉴스 CBS Evening News with Walter Cronkite〉의 앵커로 있으면서 그는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 사건에서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까지 1960년대 미국인들의 삶에 가장 상처가 되었던 순간과 승리의 기쁨을 누렸던 순간을 모두 보도했다. 크롱카이트 보도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그의 논평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1968년 그는 앵커 데스크를 비우고 테트 공세의 여파에 대해 베트남에서 보도했다. 베트남 전선을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 크롱카이트는 이례적으로 그의 평소의 객관적 태도에서 벗어나 미국은 베트남에서 수렁에 빠져 있다고 논평했다.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그의 측근에게 "크롱카이트의 마음을 잃었다면 미국의 중산층을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 해 존슨 대통령의 재선 불출마 결정은 크롱카이트의 보도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크롱카이트는 1970년대에도 CBS에서 앵커의 자리를 지켰다. 이 기간에 미국의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 간의 역사적 중동 평화협상을 포함하여 10여 년간 발생한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보도했다.
뉴스를 마무리하면서 즐겨 썼던 클로징 멘트 "세상일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And that's the way it is)로 알 수 있듯이 친숙하고 믿음직한 그의 표정과 언론인으로서의 진실성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태도는 미국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1972년 여론조사에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신뢰 받는 공인'으로 인정받았다.
크롱카이트는 1961~81년에 걸친 미국의 거의 모든 유인 우주비행을 보도했다.
우주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시청자들에게 그는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전달함으로써, 그는 우주비행사들 못지않게 미국 우주 계획에서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호소력 깊은 그의 열정은 방송중에 종종 드러났다. 특히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 "Go, baby, go!"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1981년 〈월터 크롱카이트의 CBS 이브닝 뉴스〉의 앵커로 19년 동안 활약한 후 사임했지만, 그는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미국공영방송(Public Broadcasting Service/PBS)과 다양한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들 가운데 그가 보도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연대기적으로 다룬 미니시리즈 〈크롱카이트는 기억한다 Cronkite Remembers〉(1997)가 있다. 그는 또한 미국공영라디오(National Public Radio/NPR)의 프로그램 〈모든 것을 고려해본다면 All Things Considered〉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CBS 특파원으로도 일했다.
1996년 크롱카이트는 자서전 〈어느 기자의 인생 A Reporter's Life〉을 펴냈다.
크롱카이트가 수십 년간 뉴스를 진행하면서 에미상과 피보디상을 몇 차례 수상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방송 언론인이 되었다. 1981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에게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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