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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신라 지증왕 또는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문무왕대에 원효국사가 이전부터 있던 암자를 개축한 뒤 머무르면서 원효사·원효암·원효당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려 충숙왕 때 화엄종의 한 승려가 이곳에 절을 짓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 증심사(證心寺)를 중창한 석경(釋經)이 건물들을 다시 세우고 천왕문을 건립했다. 1636년(인조 14)에는 신원(信元)대사가 중수했고, 이듬해 9월에는 왕견(王堅)대사가 32불을 조성하여 안치했다.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信玉)과 정식(淨式)이 지붕을 고쳤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會雲)이 선방(禪房)을 중창한 후 1802년(순조 2)에 법당을 다시 지었다. 1831년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乃圓)과 의관(義寬)이 각각 중수했으며 1927년에는 원담(圓潭)대사가 계속 중수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1954~60년에 걸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1980년 5월 대웅전 중창불사(重創佛事) 때 금동불상을 비롯하여 소조불상군·토기·와당·철불두상·고려자기 등 시대가 다른 각종 유물이 140여 점 출토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는 고려시대 부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를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와 원효대사부도 등이 있다.
원효사소조불상군
원효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소조불상군.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1980년 5월 6일 대웅전 중창 때 발견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의 불상은 한 점도 없으며 대부분 머리부분과 몸체로 나누어진 파편들뿐이다. 그중에서 거의 완형에 가까운 불두(佛頭)는 35점 정도이고 불신은 약 40점인데, 표면에는 도금과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소조불상 파편은 크기와 유형에 의해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부분에는 나발(螺髮)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고 육계는 뾰족한 형태로 되어 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가늘고 긴 눈과 짧은 코, 작은 입 등이 표현되어 도톰하고 뚜렷한 인중과 함께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려의 불교). 불신은 대부분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어 있는데 상체에 비해 무릎의 폭이 상당히 좁아 불안정한 모습이며, 결가부좌한 두 발은 모두 드러나 있다. 밋밋한 가슴 위로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으며 옷깃이 굵은 띠로 표현되었고 승각기(僧脚崎)의 띠매듭은 가슴 위에까지 올라와 수평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착의형식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불상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손은 대개 무릎 위에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서로 포개어 있는 선정인(禪定印)과 왼손은 무릎 가운데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있다. 이 소조불상은 크기나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한 틀에서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양식적 특징이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인다. 또한 다량으로 생산된 점에서 천불 또는 삼천불상으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므로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천불전지(千佛殿址)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불상의 단정하고 온화한 얼굴표현, 뾰족한 육계, 빈약한 체구, 법의의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시대의 원오리소조불상과 신라와 고려시대의 성주사지 소조삼천불상과 함께 당시의 천불사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밖에도 절터에서 사자나 코끼리상의 파편과 금동비로자나불상 등이 발견되어 천불의 주존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하는 비로자나불상이나 석가모니불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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