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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브리튼 왕국의 전설적인 왕 아서가 사용한 탁자.
저지의 와스가 쓴 〈브루트 이야기 Roman de Brut〉(1155)에 처음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아서 왕은 거기에 앉는 신하는 누구도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려고 원탁을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13세기와 그 이후의 로맨스에 나타난 원탁의 문학적 가치는 아서 왕궁의 기사들에게 각자의 이름과 성격을 부여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원탁의 동료의식은 실제로 중세 후반에 유럽에서 확립된 기사도에 비견되며, 많은 점에서 기사도의 원형이 되었다. 토머스 맬러리 경이 〈아서 왕의 죽음 Le Morte d'Arthur〉을 쓴 15세기말경에는 기사도 개념이 위대한 군주 밑에서 확립된 고결한 전우애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로베르 드 보롱의 시 〈아리마티의 조지프 Joseph d'Arimathie〉(1200경)에서 주인공 퍼시벌이 찾는 성배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한 술잔과 동일시되었다. 요셉은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탁자를 만들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자리를 상징하는 빈 자리를 남겨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죽음의 자리'(Siege Perilous)라고 불리는 이 빈 자리에는 운명적으로 정해진 성배 영웅만이 안전하게 앉을 수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앉으면 죽었다.
13세기 내내 성배 주제는 통속 연작(Vulgate cycle)과 후기 속(續)불가타판 로맨스로 알려진 한 무리의 산문 로맨스 속의 아서 왕 전설과 합쳐져, 성배 탁자를 본떠 빈 자리를 남겨둔 원탁은 조언자 멀린이 아서 왕의 아버지인 유서 펜드래건 왕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굳어졌다. 원탁은 카멜리드의 레오그랜 왕이 소유했다가 그의 딸 귀네비어가 아서와 결혼할 때 지참금의 일부로 아서에게 주었다. 원탁의 기사단에는 가장 용감한 기사만 들어올 수 있었으며, 죽음의 자리는 성배를 찾아내 아서 왕국의 환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완벽한 기사 갤러해드가 올 때를 위해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윈체스터 시에는 정복자 윌리엄이 짓기 시작해 1235년 완성한 성의 유적지인 큰 홀이 있는데, 이곳에는 소위 아서 왕의 원탁이라 불리는 것이 벽에 붙어 있다. 지름이 5.5m인 이 원탁은 13세기에 만들어져, 헨리 7세의 재위기간에 튜더 왕가의 색상인 녹색과 흰색으로 다시 칠해졌다(→ 아서 왕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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