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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

다른 표기 언어 圓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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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542(진흥왕 3)/554(진흥왕 15)경,
사망 640(선덕왕 9)/637(선덕왕 6)경
국적 신라, 한국

요약 불교의 중흥에 기여했으며, 나중에 화랑도의 이념이 된 세속오계를 만들었다. 세속오계는 불교의 보살계 정신을 바탕으로 여기에 유교 이념을 가미하여 원광이 독창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원광은 출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당시 신라의 세속적이고도 현실적인 요구에 적극 부응했는데, 이러한 국가불교적 성격은 이후 한국불교를 일관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진, 오, 수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한 후, 불교학의 발전에 기여했고, 불교와 전통적인 주술을 조화시켜 불교의 토착화를 이끌었으며, 불교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세속오계도 그런 결과물의 하나였다. 640년에 99세로 황룡사에서 입적했으며, 삼기산 금곡사에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 잔재가 있다.

속성은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 경주의 귀족 출신이다.

일찍이 노장(老莊)·유학(儒學)·제자(諸子)·역사를 공부했다. 25세에 남중국의 진(陳)나라로 유학했다. 처음에 진나라 금릉(金陵)의 장엄사(莊嚴寺)로 가서 승민(僧旻)의 제자에게 배운 다음, 진나라 국왕의 허락을 받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여러 곳을 다니며 〈성실론 成實論〉·〈열반경 涅槃經〉을 비롯한 경전을 공부했다. 다시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수행에 힘쓰는 한편 〈아함경 阿含經〉을 읽었다. 세속과 인연을 끊고자 했으나 교도의 요청에 따라 〈성실론〉·〈반야경 般若經〉을 설법하여 명성을 떨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생 제도를 임무로 삼기 시작했다.

그후 수(隋)나라가 진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할 뻔했으나 수나라 장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589년에는 수나라의 장안(長安)으로 갔다. 여기서 〈섭대승론 攝大乘論〉 등을 연구하여 중국 불교계에 이름을 떨쳤다. 일설에는 13세에 출가하고 30세부터 몇 년 간 경주 삼기산(三岐山)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589년경 산신(山神)의 권유를 받고 중국에 유학갔다고도 한다. 신라 국왕의 요청을 받고 600년(진평왕 22)에 사신 제문(諸文)의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그의 유학과 귀국 후의 활동 및 그 사상사적 의미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불교학에 대해서이다. 그는 6세기 후반 중국불교계에서 연구되고 있던 아함학·성실학·열반학·섭론학 등의 주요한 불교사상을 모두 섭렵했다. 또 귀국 후에는 대승경전을 1년에 2차례씩 강의하며 제자 양성에도 힘썼다. 이는 중국불교계의 연구성과가 본격적으로 신라불교계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불성론(佛性論)을 언급한 〈여래장경 如來藏經〉에 대해 신라인으로는 최초로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신라인들의 전통적인 인간관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이후 신라인들이 불교철학을 열정적으로 연구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불교와 전통적인 주술의 조화 문제이다. 원광이 유학 가기 이전 삼기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주술에 능한 승려와 갈등을 빚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주술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이 사상사적 과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귀국 후 삼기산 가실사(嘉悉寺)에서 점찰법(占察法)을 실시했다. 그가 유학할 때 중국불교계에 처음 등장한 점찰법을 수용하여 신라불교계에 소개한 것이다.

점찰법은 점을 친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신앙과 동일하지만, 그 사상적 배경이 악행을 막고 선행을 권장하는 불교의 수계참법(授戒懺法)에 있으므로, 이미 불교적으로 윤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 병들었을 때 법을 말하고 계를 주며 참회하게 하여 병을 고친 것은 그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불교대중화로서는 최초이지만, 점찰법을 매개로 했다는 점에서 정토신앙을 매개로 한 후대의 것과 다르다. 셋째, 국가(世間)와 불교(出世間)와의 조화 문제이다. 그는 승려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외교문서의 작성과 정치적 자문과 같은 세속적 임무도 요청받았다. 608년에 왕이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대응하고자 수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글을 원광에게 쓰게 하자, "자신이 살려고 남을 해치는 일은 승려로서 할 바가 아니나, 제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걸사표 乞師表〉를 지었다.

613년에는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와서 황룡사(皇龍寺)에서 호국적인 성격이 강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개최할 때 이를 주관했다. 또한 가실사에 머무를 때 귀산(貴山)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세속오계는 불교의 보살계 정신을 바탕으로 여기에 유교 이념을 가미하여 원광이 독창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나중에 화랑도(花郞徒)의 이념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와 같이 원광은 출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당시 신라의 세속적이고도 현실적인 요구에 적극 부응했는데, 이러한 국가불교적 성격은 이후 한국불교를 일관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640년에 99세로 황룡사에서 입적했으며,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 잔재가 있다. 저서로 〈여래장경사기 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 如來藏經疏〉 1권이 있었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제자로는 원안(圓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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