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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87.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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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8. 4. 19, 런던 |
국적 | 잉글랜드 |
요약
영국의 식민지 관리.
Baron Rich라고도 함.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종교적 관용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1642년 함대 제독으로 있으면서 영국내란(청교도혁명, 1642~51)에서 해군이 의회파를 지지하게 했다. 워릭 백작 1세 로버트 리치와 그의 아내 페니로프 사이의 맏아들로 1619년 백작작위를 계승했다. 버뮤다회사·기니아회사·아마존강회사·뉴잉글랜드회사·버지니아회사 등의 운영에 참여했다. 버지니아회사는 워릭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분규 때문에 1624년에 운영이 금지되었다. 그는 청교도주의에 공감을 가졌으므로 영국 궁정에서는 총애를 받지 못했으나, 한편 이러한 성향 때문에 뉴잉글랜드 식민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1628년 그는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의 특허장을 따내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1632년에는 코네티컷의 세이브룩 정착지(1635)에 특허장을 수여했다. 1632년에 뉴잉글랜드회사의 총독직을 사임하고 나서도 버뮤다회사와 프로비던스아일랜드회사(1630 창립)를 계속 경영했다. 당시 프로비던스아일랜드회사는 중앙 아메리카의 모스키토 연안에 있는 올드프로비던스를 관할하면서 국왕 정책 비판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워릭과 그의 동생 홀런드 백작 1세 헨리 리치는 모두 청교도의 지도적 인사였고 특히 장기의회 때는 상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642년 3월 찰스 1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원의원들은 워릭을 함대 제독으로 임명했다. 그해 7월 워릭의 지도로 해군은 의회파로 돌아섰다. 내란기간에 그는 국왕의 선박을 공격하고 왕당파의 위협에 시달리는 몇몇 항구를 구출했다. 1643년 그는 한 식민 정부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위원회는 1644년 프로비던스 대농장을 편입했고 이것은 뒤에 로드아일랜드 주로 발전했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식민지가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워릭 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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