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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95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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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30. 7. 29, 노르웨이 스티클레스타 |
국적 | 노르웨이 |
요약
축일은 7월 29일. 최초로 노르웨이 전지역을 다스린 왕이며 노르웨이의 수호성인.
(영). Olaf Ⅱ Haraldsson Hellig-Olav. (Saint Olav)라고도 함.
12년 동안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고 그리스도교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1024년 그가 제정한 종교법은 노르웨이 최초의 국가 입법으로 여겨진다. 영주 하랄 그렌셰의 아들이자 노르웨이 통치자 금발왕 하랄 1세의 후손인 그는 비(非)그리스도교도로 자랐고 발트 해 지역에서 바이킹 전사가 되었다.
1009~11년 잉글랜드와 싸웠으나 1013년에는 잉글랜드 통치자 에설레드(애설레드) 2세를 도와 데인족과 싸웠다. 덴마크 왕 스벤 1세가 잉글랜드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자 울라프는 스페인으로 갔다가 프랑스로 가 1013년 세례를 받았다.
1015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전에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인 라데 백작 호콘이 지배하던 영토를 정복했다. 1016년에는 이미 노르웨이 전역에서 자신의 통치를 확립했다. 그뒤 12년 동안 울라프는 국내의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선교사들을 이용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것을 엄격하게 강요했다.
노르웨이 교회의 기원은 올라프와 교회 문제에 대한 그의 조언자인 그림헬 주교가 모스터에서 종교법을 제정한 1024년으로 여겨진다.
올라프는 1019년경 스웨덴 왕 올라프 쇠트코눙의 분쟁을 해결하고, 잉글랜드 왕이자 덴마크 왕인 크누트가 노르웨이를 정복하려고 위협할 때 스웨덴 왕의 아들 아눈드 야코프와 연합군을 결성했다. 크누트가 노르웨이 서부로 가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울라프보다 더 간접적으로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자 노르웨이의 지도적인 족장들은 크누트를 지지했다. 울라프는 1028년 크누트에게 밀려 러시아로 망명해 키예프에서 스웨덴 출신인 아내의 친척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했다.
1030년 울라프는 아눈드 야코프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를 다시 정복하려 했으나 고대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인 스티클레스타(1030) 전투에서 우세한 노르웨이 농민군과 덴마크군에 패했다. 그의 인기와 교회 사역, 그리고 기적적인 사건들을 동반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전설로 인해 울라프는 다음 해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영국·스웨덴·로마에는 그를 기리는 교회와 성지가 세워졌다. 그는 동방교회가 마지막으로 받아들인 서방의 성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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