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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10경, 프랑스 랑그도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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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70. 12. 19, 프로방스 아비뇽 |
국적 | 바티칸시티 |
요약
1870년 3월 10일 복자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2월 19일. 교황(1362~70 재위).
(영). Blessed Urban Ⅴ. 본명은 Guillaume de Grimoard.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베네딕토 수도회에 가입했고, 후에는 아비뇽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1352년에 오세르의 생제르맹 대수도원장, 1361년에는 마르세유의 생빅토르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1362년 9월 28일에는 인노첸시오 6세의 계승자로 선출되어 1309~77년 교황청이 자리잡고 있던 아비뇽에서 교황에 임명되었다.
교황이 된 뒤 이탈리아가 평화를 되찾도록 도왔고 아비뇽 교황청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1365년에는 프랑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청을 다시 로마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그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아비뇽에 있는 우르바노를 방문한 뒤 그를 로마로 호송했다. 그해 6월 4일 교황은 카를을 부르고뉴의 왕으로 세웠다.
우르바노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다시 통일하는 것이 긴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며, 교황청을 로마로 옮기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협상하기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367년 4월 30일에 아비뇽을 떠나 10월 15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바티칸에서 교황직무를 시작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운명이 못 되었다. 교회들이 대부분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본 그는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1369년 10월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5세는 로마에서 우르바노를 만나 로마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비잔티움 교회를 로마 교회에 종속시키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요한네스를 추종하는 성직자들과 민중이 그를 지지하지 않는 바람에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는 분리된 채 남아 있었다. 우르바노는 타협을 이루지 못했고, 동방과 서방의 연합공의회 소집을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1369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전쟁을 시작했고, 로마와 교황령에서도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 1370년 9월 우르바노는 아비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엄격한 생활을 했고, 신앙이 매우 깊었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여 오랑주·크라쿠프·빈에 대학교를 새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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