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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4세기 중반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에 고려는 친명외교를 표방하면서도 원과의 외교관계를 이어갔다. 명나라는 요동에서 원의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고 1388년 요동에서 철령까지 역참을 설치하려 관리를 파견했다.
이에 최영과 우왕이 중심이 되어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최영, 조민수, 이성계 등을 군도통사로 삼아 파병하였다.
이성계가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의 불가능성을 들어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것으로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14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세워지는 등 대륙정세가 변화했는데, 고려는 공민왕의 반원정책 시행 이후 친명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원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는 요동지방에서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점차 고려에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명은 1388년 3월에 이르러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의 영토였으므로 명에 속해야 한다며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역참을 설치하고자 관리를 파견했다.
이에 고려는 최영과 우왕이 중심이 되어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에 최영을 8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하고, 우왕이 몸소 평양까지 나아가 군대를 격려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위화도에서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것으로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위화도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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