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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4. 3. 17, 부다페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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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 4. 19, 뉴욕 시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개혁파 유대교의 랍비, 시온주의운동 지도자, 시민운동가.
미국의 개혁파 유대교 발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템플 베스 이즈리얼'에서 랍비로 일하면서(1900~06), 적극적인 사회복지 활동을 벌이고 오리건 주 미성년자 노동국장을 지냈다. 그뒤 뉴욕으로 가서 '자유 회당'(Free Synagogue)을 세우고(1907) 죽을 때까지 이 회당을 이끌었다.
미국 유대교의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 회당의 주요원칙들은 자유로운 설교, 빈부의 차별 없는 예배실 좌석개방, 회당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등이었다. 와이즈는 뉴욕 시 도시문제를 놓고 민주당 당수 리처드 크로커와 맞선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1931년에는 '도시문제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서 제임스 J. 워커 시장의 행정을 비판했다.
와이즈는 미국 유대교 지도자로서 시온주의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898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2차 시온주의자 대회에 참석하여 근대 시온주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을 만났고, 1898년에 '아메리카 시온주의자 조직'(Zionist Organization of America/ZOA)을 창설하여 2차례에 걸쳐 의장을 지냈으며(1917, 1936~38), 영구적인 '아메리카 유대인 대회'(permanent American Jewish Congress)와 '세계 유대인 대회'(World Jewish Congress)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민주당의 주요당원이자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친구로서 미국 정부에게 밸푸어 선언을 받아들이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30년대에는 미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922년 와이즈는 뉴욕 시에 유대인 종교연구소(Jewish Institute of Religion)를 세웠는데, 이 연구소는 사회봉사와 유대인 교육을 위한 랍비 신학교로서, 특별히 뉴욕 지역의 자유주의적 랍비 훈련에 그 목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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