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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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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16. 12. 16, 일 한국 이란 카즈빈 근처 솔타니예 |
국적 | 일한조 |
요약
이란을 지배한 일 한국의 8번째 왕.
이슬람식 이름은 Moḥammad Khudābanda.
재위기간중 이슬람의 시아파를 처음으로 이란의 국교로 선포했다. 일 한국의 창건자 훌레구의 증손자인 울제이투는 어렸을 때 그리스도교도로 세례를 받아 어머니가 니콜라스라는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청년이 되자 불교로 개종했으며, 그후 다시 이슬람의 최대 종파인 수니파로 개종하여 모하마드 후다반다라는 이름을 가졌다.
제7대 왕인 형 마흐무드 가잔이 죽고(1304) 뒤 그는 경쟁자를 손쉽게 물리치고 비교적 평화롭게 왕위에 올랐다. 1307년에는 질란이라는 카스피 해 연안을 정복, 일 한국의 통치를 강화하고 헤라트(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있음)에서 일어난 위험한 반란도 진압했다. 그러나 일 한국과 시리아 및 이집트의 맘루크들 사이의 전통적인 적대관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에 올제이투는 1312년 충분한 준비도 없이 맘루크의 영토를 침략했다가 유럽 군주들에게서 기대했던 지원을 받지 못해 원정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올제이투는 일생 동안 자신의 종교적인 소속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그가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것은 그의 부인 중 한 명 때문이었다. 그러나 1307~08년 겨울 동안에 수니파 이슬람 내의 하나피 법학파와 샤피이 법학파의 신봉자들 간에 심각한 종교적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혐오를 느낀 올제이투는 다시 불교로 개종하려고 생각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는 시아파 신학자 이븐 알 무타하르 알 힐리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이 종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있는 알리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1309~10) 뒤 시아파 이슬람을 이란의 국교로 선포했다.
예술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올제이투는 솔타니예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많은 예술가들을 새로운 수도 건설에 투입했다. 예술가들은 이 도시를 일 한국 건축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라시드 앗 딘의 기념비적 세계사 저술과 이란 시인들의 노력에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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