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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7. 12. 23, 슐레지엔 분츨라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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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39. 8. 20, 그다인스크 |
국적 | 독일 |
요약 독일의 시인·문학이론가.
독일문학에 외국문학의 모범·규칙을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하이델베르크·레이덴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때 다니엘 하인지우스를 만났다. 여러 지방영주들 밑에서 봉직하느라 떠돌이 생활을 했다. 1625년 오스트리아 카를 요제프의 죽음에 대해 만가를 쓴 보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웠고, 뒤에 그를 귀족에 봉했다.
1629년 독일어 개혁을 목표로 하는 문학단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열매맺는 협회'(Fruchtbringende Gesellschaft)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630년 파리로 갔으며 거기에서 후고 그로티우스와 교제했다. 1635년부터 말년까지 단치히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폴란드의 부아디수아프 4세는 그를 사료편찬원 및 비서관에 임명했다.
그는 소위 '제1차 슐레지엔' 시파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당대의 가장 훌륭한 독일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적어도 시의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일 시의 아버지'였다.
그는 〈Aristarchus sive de Contemptu Linguae Teutonicae〉(1617)에서 독일어가 시에 적합함을 주장했고, 영향력 있는 저작 〈독일 시학서 Buch von der deutschen Poeterey〉(1624)에서는 언어의 '순수성'·문체·시형·운율에 대한 영속적인 규칙들을 수립했다. 또 이 책에서는 독일 시에 바탕을 두고 음절보다는 오히려 단어의 강세를 강조했으며 또한 알렉산더격을 추천했다.
그가 도입한 학자풍의 과장된 궁정 문체는 18세기 중반까지 독일 시문학을 지배했다. 그의 시는 자신이 만든 엄격한 규칙을 준수했고, 세심하게 고려된 주제들을 정교하게 형식화시킴으로써 대개 교훈적이고 묘사적이며, 아름다움과 감정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나중에는 미학교사·번역자로서의 활동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는 하인지우스·그로티우스·세네카·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독일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 Dafne〉의 대본을 O. 리누치니의 원문에서 일부 번역하기도 했다. 독일에 정치소설(존 바클리의 〈아르게니스 Argenis〉)을 소개했으며, 1638년 필립 시드니 경의 〈아르카디아 Arcadia〉와 11세기에 나온 〈아노의 노래 Annolied〉의 독일어판을 펴냈다. 그의 〈오페라 시학 Opera Poetica〉은 1646년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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