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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4. 8. 25, 잉글랜드 켄트 베커넘 근처 이든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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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9. 1. 1, 햄프셔 앨러스퍼드 근처 그레인지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인도 총독(1836~42).
2nd Baron Auckland, 2nd Baron Auckland of Auckland, Baron Eden of Norwood라고도 함.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이 곤경에 처하게 된 데 대한 책임으로 1842년 영국으로 소환되었다.
1814년 아버지의 남작 지위를 계승하고 휘그당원으로 상무장관과 해군장관으로 일하다가 1835년 새로 토리당 내각 총리가 된 친구 멜버른 경에 의해 인도 총독으로 뽑혔다. 다음해 2월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완충국가들을 영국의 우방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 도착했다. 그당시 이미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 사절을 보내 남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중앙 아시아에서 영국의 교역과 영향력을 확대시키겠다는 욕심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도스트 모하마드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러시아와 페르시아의 방해를 받게 되자 모하마드를 그의 경쟁자 샤 쇼자로 교체했다. 이후 쇼자는 영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오클런드는 조약을 무시하고 협박을 가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1839년에 이르러 쇼자는 카불과 칸다하르를 장악했다. 이런 노력의 대가로 오클런드는 1839년 백작으로 승격되었다. 아프가니스탄 행정에 관여해 그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쇼자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인도재정의 유출을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 개혁과 부족보조금 지급의 중단을 명령함으로써 지역 소요사태를 초래했으며 이것은 영국군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했다.
1841년 겨울 영국군이 카불에서 후퇴하는 동안 5,000여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영국은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 가운데 1842년 그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정부의 비난과 여론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사태를 받아들였으며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의 후임 총독이 쇼자를 쫓아내고 도스트 모하마드를 복권시켜 일시적 안정을 되찾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독으로서 그는 훌륭한 행정을 펼쳐 관개시설을 확대하고 기아구제를 실시했으며, 인도 실정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인도 발전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조치로 직업훈련을 확대했다. 1846년 다시 해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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