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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로

다른 표기 언어 Pierre-François-Charles Augereau
요약 테이블
출생 1757. 10. 21, 파리
사망 1816. 6. 12, 라우세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육군장교.
Duc de Castiglione라고도 함.

타고난 군사적 재능으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화려한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파리에서 가난한 하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세 때 직업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외국의 군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792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빠른 진급을 거듭하여 1793년에는 피레네 산맥 동부에서 1개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1795년 이탈리아 원정군 부사령관에 임명된 오주로가 카스틸리오네에서 승리를 거두자(1796. 8. 5) 나폴레옹은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오주로는 프뤽티도르 18일(1797. 9. 4)의 쿠데타를 지휘했고, 혁명 정부인 총재 정부는 그를 라인 제7군단 사령관에 임명했다. 1798년 프랑스 국회의원 겸 정무장관에 선임된 그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18일(1799. 11. 9)의 쿠데타에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지지를 맹세했다.

나폴레옹은 오주로의 충성이 변덕스럽다고 여겨 그를 프랑스-네덜란드 연합군 하급 사령관에 임명했다. 1801년 원래의 계급으로 복귀한 그는 독일 원정군의 사단장이 되어 오스트리아군과 몇 차례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아일라우 전투(1807. 2. 7~8)에서 그의 부대는 눈보라 속에서 방향을 잃어 병력의 절반가량을 잃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1808년 그를 카스틸리오네 공작으로 임명하고, 스페인 카탈루냐의 부대를 지휘하게 했으나 그는 곧 패하고 말았다.

1810년 프랑스로 소환된 오주로는 1812년 러시아 원정군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맡았다. 이듬해 그는 독일에서 전투를 계속했지만, 라이프치히에서 패한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1810년경 오주로는 이미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1814년 리옹에서 또다시 패한 뒤 그는 나폴레옹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제1차 왕정복고) 그는 자신이 왕당파라고 선언했다.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반감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후한 보상을 내렸다. 그는 1815년에 다시 나폴레옹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나폴레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 왕은 그에게 어떤 지휘권도 주지 않았고, 그는 라우세에 있는 영지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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