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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 11. 23, 멕시코 시우다드구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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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9. 9. 7, 멕시코 시 |
국적 | 멕시코 |
요약 멕시코의 화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서 초기부터 멕시코의 고유한 예술적 전통의 영향을 보여준다.
1914년 혁명을 지지하는 선전예술가로 활동했으며 그후에는 이따금 미국에서 생활하며 당대의 유명한 평론가와 도덕론자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듣기도 했다. 1932~34년 뉴헤이번 주 하노버의 다트머스대학에 중요한 프레스코 연작을 그렸다. 그의 사상적 신념은 과달라하라에서 그린 벽화(1936~39, 1949)와 같은 후기 작품들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오로스코 가문은 할리스코에서 유력한 집안으로 자신들이 서부 멕시코 정복자들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그는 가족이 멕시코 시로 옮겨간 1890년 처음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매일 등하교 길에 멕시코 제일의 위대한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의 작업실에 들렀다. 포사다의 그로테스크한 풍자만화와 삽화는 무서운 범죄와 정치적 스캔들을 보도하는 인기있는 신문에 자주 등장했다. 그는 포사다의 강렬한 이미지와 생생한 화풍에 매료되었고 이때 받은 영향은 평생 동안 이어졌다.
그는 이내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산카를로스 미술학교에서 소묘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장래의 사회비평가로서 자기 작품에 대한 남들의 비판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빈번히 그의 작품에 쏟아지는 신성모독적이고 반교회적이라는 비난에 맞서며 아들을 옹호해야 했다. 1890년대말에는 농학, 그후에는 건축설계사 공부를 강요받아 미술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17세 때 사고로 왼손을 잃게 되자 건축을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림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1905년에 산카를로스 미술학교에 재입학하여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동료들과 달리 사진을 찍은 듯이 사실적인 그림이 나올 때까지 모델을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 그리게 하는 미술학교의 엄한 훈련을 즐겼다.
예술과 관련하여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당시 진보적인 학생이던 헤라르도 무리요와의 만남이었다.
무리요는 당시의 문화적 반(反)멕시코주의에 반대하며 아틀 박사라는 아스텍식 가명을 썼고 예술가들에게 유럽의 문화적 지배를 거부하고 멕시코적 특성을 살릴 것을 촉구했다. 그의 영향으로 오로스코는 멕시코적 주제를 의식적으로 탐구하고 더욱 직접적으로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0년에 그를 포함해 아틀 박사와 함께 작업하는 청년미술가들이 처음으로 멕시코 미술가전을 개최했으며 같은 해에 '미술 센터'라는 협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를 통해 정부청사에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마데로의 반란으로 대규모 예술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미술 센터는 얼마 후 해체되었다.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오로스코는 한 야당지의 풍자만화가가 되어 멕시코 시의 빈민가에 관심을 기울이며 창녀들을 주제로 수채화 연작을 그렸다. 이때의 〈눈물의 집 House of Tears〉 연작은 강렬한 색채로 초기 표현주의 화풍을 보여주며 창녀를 인간 타락의 상징으로 표현한 최초의 작품이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자칭 인상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이에 염증을 느낀 오로스코는 그곳을 떠나 자신만의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14년 멕시코에 다시 내란이 발생하자 그는 혁명신문 〈방과르디아 La vanguardia〉('전위')를 통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장군을 지지하는 풍자화를 그렸다.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참혹성과 난폭성을 목격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신과 예술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1917년 〈눈물의 집〉 연작을 둘러싼 비평가와 도덕론자의 반발로 멕시코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시에서 불행한 몇 년을 보냈다. 1920년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자신을 열성적으로 후원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국립예비학교의 벽화를 주문받아 이른바 멕시코 벽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여기에 그린 〈모성 Maternity〉·〈십자가를 부수는 그리스도 Christ Destroying His Cross〉 같은 그의 초기 벽화들(1923~27)은 독창성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대부분을 파기해버렸다.
그러나 1926년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기에 이르러 〈코르테스와 말린체 Cortés and Malinche〉(국립예비학교)·〈참호 The Trench〉(국립예비학교)는 멕시코 미술사상 최초의 기념비적 웅장함을 보여준다.
1927년 오로스코를 비롯한 벽화가들에 대한 정부의 후원과 보호정책이 철회되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비평가와 도덕론자 또는 보수주의자의 공격으로 그는 또다시 미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조국으로부터 모욕을 받은 그는 뉴욕 시에 정착한 뒤 국제적 명성을 얻어 자국민들에게 자신의 예술적 진가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맨해튼의 유력한 예술후원자의 살롱(여기에는 시인 칼릴 지브란도 있었음)에 자주 드나들면서 점차 미국 예술계에 알려졌으며 1930년 마침내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에 있는 퍼모나대학 휴게실의 대형 벽화를 주문받게 되었다. 사회비판과 역사적 주제를 접어두고 보다 보편적인 것을 다루기로 마음먹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고대 그리스 신화의 자기희생적인 거인 프로메테우스를 벽화의 주제로 선정했다.
조형적인 면에서는 이전에 보여주었던 안정된 양식에서 탈피를 꾀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고통받는 인물들의 열정적인 묘사와 아틀의 소묘를 회상하면서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으로 전력을 다해 운명의 굴레에 맞서는,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기념비적 거인의 모습으로 프로메테우스를 그려냈다.
이와 대조적으로 뉴욕 시의 사회연구학교에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혁명을 주제로 그린 벽화들은 고대 그리스의 균형미를 재현하려는 의도로 1920년대에 유행한 '역동적 균형' 이론을 상투적으로 추종했을 뿐 생명력을 잃고 있다.
1932년에 잠시 유럽을 여행하면서 영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지의 예술을 경험했다.
그는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감명받았지만 로마와 라벤나에 있는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에 더욱 깊은 찬사를 보냈으며 그 영향은 다트머스대학의 위대한 벽화 연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화가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그림으로 보여주듯이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켓살코틀의 도래 The Coming of Quetzalcoatl〉·〈켓살코틀의 귀환 The Return of Quetzalcoatl〉이라는 두 장면을 주제로 한 연작벽화에 담아 표현했다(→ 비잔틴 예술). 여기서의 2분법은 인간이 비그리스도교적인 태초의 낙원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자본주의의 지옥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모자이크화의 영향은 〈현대의 성령 이동 Modern Migration of the Spirit〉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한 교육 Stillborn Education〉이나 켓살코틀 벽화는 기이하면서도 거친 힘을 느끼게 하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풍부하고 원숙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러 확고한 명성을 얻은 그는 1934년 당당하게 멕시코로 돌아왔다.
멕시코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벽화 〈카타르시스 Catharsis〉를 완성했다. 종말론적인 이 작품은 한 창녀가 최후의 대격변으로 인한 폐허 속에 누워서 웃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염세주의는 끊임없이 심화되어 과달라하라 벽화에서 절정에 달했다. 과달라하라대학 강당과 도제 궁전(1937), 그리고 카바냐스 빈민수용소 고아원 예배당(1938~39) 등지의 벽화에서는 다트머스대학의 작품과 〈카타르시스〉에서 다룬 역사적 주제가 반복되고 있지만 그가 다시는 시도한 적이 없을 만큼 격렬한 고뇌와 절망을 담고 있다.
여기서 역사는 그저 맹목적으로 아마겟돈을 향해 몰락해가고 있다. 구원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수용소 천장에 그린 자기희생적인 창조적 인간, 즉 〈불의 인간 Man of Fire〉이다. 가비노 오르티스 도서관 벽화나 법원 벽화, 최후의 대작 〈민족적 우화 National Allegory〉(1947~48, 멕시코 시 사범학교) 등을 비롯한 후기 벽화에서는 보편적 주제를 버리고 전적으로 민족주의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풍경 Metaphysical Landscape〉(1948, 멕시코 시 오로스코 재단)같이 캔버스에 그린 작품은 신비주의로 향하고 있음을 암시해주며 추상적 경향으로 보아 그가 죽을 무렵에는 비구상 회화로 변화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사파타주의자들 Zapatistas〉(1931, 뉴욕 시 현대미술관) 같은 캔버스 작업이 종종 벽화와 같은 웅장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벽화야말로 그의 결정적인 표현수단이며 천재성의 본보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청소년기에 투쟁과 박해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오로스코는 말년에 이르러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며 멕시코 예술을 국제적 지위로 끌어올린 예술가들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1947년에 멕시코 대통령은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운 인물에게 주는 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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