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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닐

다른 표기 언어 Shane O'Neill
요약 테이블
출생 1530경
사망 1567. 6. 2, 아일랜드 앤트림 쿠쉰던 근처
국적 아일랜드

요약 아일랜드 오닐족의 족장.
별칭은 Shane An-Diomais (Shane the Proud).

오닐 가문을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사람에 속한다. 그는 콘 오닐의 적자이며 맏아들로 오닐족의 족장이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잉글랜드는 그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총독인 서식스 백작의 자문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앤트림 해안에서 스코틀랜드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잉글랜드에 협력하는 것도 거절했다. 대신에 그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맥도넬가와 손을 잡았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의 사망 후 사실상 오닐족의 족장인 그와 타협하기를 원했으므로 그가 주장하는 족장권을 승인해주고 같은 혈족인 브라이언 오닐을 축출했다. 그러나 셰인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전에는 서식스 진영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고 이러한 그의 주장이 정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는 브라이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오도늘을 선동해서 셰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셰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갈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엘리자베스는, 특히 서식스가 셰인의 영토를 짓밟음으로써 셰인이 자신의 영향력에서 더욱 멀어지자 긴급히 셰인과 타협하기를 원했다. 서식스를 지지하지 않았던 여왕은 셰인과의 타협을 위해 킬데어 백작을 파견했다. 엘리자베스 앞에 출두하는 것에 동의한 셰인은 오먼드와 킬데어의 수행하에 1562년 1월 4일 런던에 도착했다. 엘리자베스는 셰인이 스페인 음모가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와 타협하여 그가 '디 오닐'로, 티론의 족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아일랜드 귀향을 허락했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오닐 가문에서 가장 강력한 3명의 인물이 있었다. 셰인, 털로, 티론 백작이 그들인데 털로는 셰인이 런던에 가고 없는 사이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계획했었다. 불화는 셰인이 아일랜드로 돌아오면서 끝났고 그는 아일랜드에서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소란스런 전쟁을 재개했다. 엘리자베스는 할 수 없이 서식스에게 권한을 부여해 야전으로 보내 셰인과 싸우게 했으나 2차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셰인은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총독 서식스의 거듭된 공격 탓으로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협상에 동의했고 실질적으로 셰인의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그후 셰인은 잉글랜드 여왕 밑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을 탄압하는 데 몸담고 있음을 주장하며 맥도넬가에 등을 돌렸다. 1564년 콜러레인 근처에서 솔리보이 맥도넬가와 싸웠으나 판가름이 나지 않았고, 1565년 맥도넬가를 쳐부수고 솔리보이를 발리캐슬 근처에서 포로로 잡았다. 이 승리는 셰인 오닐의 입지를 강화해주었으나 잉글랜드는 그를 굴복시키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도니걸을 침공하고 오도늘을 복귀시켰다.

셰인은 레터케니에서 오도늘에게 격퇴당하고 도망치며 안전한 곳을 찾다가 적인 맥도넬가에 자신을 의탁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셰인은 소수 종자들의 수행을 받으며 자신이 포로로 데리고 있던 솔리보이를 데리고 앤트림 해안에 있는 쿠쉰던 근처의 맥도넬가 진영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그는 맥도넬가 사람들에 의하여 살해당했는데 미리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예기치 못한 소동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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