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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76년 개항 이후 김윤식·어윤중 등의 온건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에 도입된 서구과학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위한 유학생 파견을 계획했다.
1881년 영선사 일행이 육로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윤식은 이홍장과 회담을 통해 연미론, 전권대표 파견과 수호조약초안 검토, 미국사신의 내조문제 등을 협의했다. 유학생들은 화약·탄약 제조법, 기계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지식뿐 아니라 자연과학·외국어 등도 학습했다.
미흡하지만 서구의 과학기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귀국과 함께 각종 현대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 결과 1883년 국내 최초의 근대병기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될 수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의 온건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무비자강의 일환으로 중국에 도입되어 있는 서구과학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위한 유학생 파견을 시도했다.
1879년 8월 헌서뇌자관 이용숙(李容肅)은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의 밀지를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전달하면서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등에 대한 자문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이홍장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1880년 4월 정부에서 구체적 논의를 했는데, 많은 대신들은 인선·재정 문제를 들어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고종이 큰 관심을 보여, 변원규를 청에 파견해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을 체결했다.
변원규가 귀국하여 유학생 파견을 서두르자, 이준선·허원식(許元栻) 등은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는 반대상소를 올렸고, 일본 측도 신군제와 연병은 자신들의 것을 참고하기를 권했다. 이에 정부는 청·일 사이에 중립형평안을 써서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근대문물을 고루 섭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청으로의 유학생 파견은 영선사로 임명된 조용호의 병사 등으로 5차례나 일자를 변경한 끝에 1881년 9월 26일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영선사단은 영선사 김윤식, 종사관 윤태준, 별유당상 변원규·이근배 등이었다. 유학생은 고영철·이필선 등 학도 20명과 김원영 등 공장 18명으로 총 38명이었다. 결국 관원·수종·사적 수행인을 합쳐 모두 83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재정문제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항의로 병술훈련을 위한 변병 파견은 미루어졌다. 영선사 일행은 9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11월 17일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김윤식은 도착 직후 3차례 이홍장과 회담했는데, 이홍장은 일본 견제를 위해 조선의 연미론을 권유하고, 전권대표 파견과 수호조약초안 검토, 미국사신의 내조문제 등을 협의했다. 한편 유학생들은 1882년 1월 8일부터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 동국·남국에 배속되어, 화약·탄약 제조법, 기계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지식뿐 아니라 자연과학·외국어 등도 학습했다. 그러나 5월초까지 19명의 유학생이 신병 등으로 중도에 귀국했고 정부에서 재정지원을 충분히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학습이 심도있게 진행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조선의 기기창 설립 계획이 수립된 데다 6월 9일에는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유학생 파견 당시의 민씨정권이 무너지자, 유학생들의 장래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이에 김윤식 등은 청에 군병을 요청하여 같이 귀국했다가 9월 29일 잔류 유학생 귀환과 기기구입을 위해 톈진으로 갔다. 잔류 유학생들은 11월 1일 인천으로 귀국했는데, 실제 학생들의 학습기간은 6개월 정도였으며, 무비자강의 목표도 완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흡하지만 서구의 과학기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귀국과 함께 각종 현대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결과 1883년 국내 최초의 근대병기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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