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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소설가.
처녀작이나 다름없는 〈표본실의 청개구리〉(개벽, 1921. 8~10)는 이어 발표한 〈암야〉(개벽, 1922. 1)·〈제야〉(개벽, 1922. 2~6)와 비슷한 의식구조를 드러내고 있는데, 작중 화자인 '나'의 방황과 김창억의 파멸을 통해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고뇌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은 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외부현실 또한 매우 모호하게 나타나 있어 작가의 자아 및 현실인식이 아직 관념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입증해준다. 작품 안에서 현실이 어느 정도 구체성을 띠게 된 것은 〈만세전〉(원제 〈묘지 墓地〉)에 이르러서이다. 이 작품은 도쿄 유학생 이인화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도쿄를 떠나 서울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여정을 통해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과 소시민적 지식인의 민족의식 자각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소설적 성공과 함께 그의 작가적 기법을 확고히 다졌다.
〈만세전〉·〈E 선생〉(동명, 1922. 9. 17~12. 10)·〈해바라기〉(동아일보, 1923. 7. 18~8. 26) 등에서 현실에 눈뜬 그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폐허, 1924. 2) 이후 현실의 구체적인 면모를 탐구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문학(프로 문학)과는 전혀 다른 소재와 접근방법을 택했다. 즉 도회지 중간계층을 주된 대상으로 그들의 생활을 상식적·일상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또 소시민 생활과 거기서 파생되는 감정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평론 〈문예와 생활〉(조선문단, 1927. 2)·〈문학상의 집단의식과 개인의식〉(문예공론, 1929. 5) 등은 프로 문학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박영희·홍기문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현실 탐구력과 세계관은 장편 〈진주는 주었으나〉(동아일보, 1925. 10. 17~1926. 1. 17)·〈사랑과 죄〉(동아일보, 1927. 8. 5~1928. 5. 4)를 거쳐 〈삼대〉(조선일보, 1931. 1. 1~9. 17)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삼대〉는 3대로 이루어진 조씨 일가를 중심으로 일제시대 대지주 계급의 삶과 역사적 운명을 그려내 당대 사회의 객관적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발표한 장편 〈무화과〉(매일신보, 1931. 11. 13~1932. 11. 12)는 〈삼대〉와 마찬가지로 이씨 일가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일제 말기 만주사변의 발발 등으로 점차 경색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그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백구白鳩〉(조선중앙일보, 1932. 10. 31~1933. 3. 31)를 썼지만 몰락해가는 현실 속에서 희망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결국 무위(無爲)로 끝났으며, 〈모란꽃 필 때〉(매일신보, 1934. 2. 1~7. 8)를 비롯한 8·15해방 전까지의 소설은 통속소설과 가벼운 콩트가 대부분이다.
해방 직후 귀향 체험과 좌우익 대립을 그린 몇 편의 단편을 썼고, 이후 〈임종〉(문예, 1949. 8)·〈두 파산〉(신천지, 1949. 8)·〈일대의 유업〉(문예, 1949. 10)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일상적이고 중립적인 자기 세계를 되찾게 되었고 그후의 작품들은 대체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6·25전쟁 때 적치하의 생활을 그린 장편 〈취우 驟雨〉(조선일보, 1952. 7. 18~1953. 2. 20)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그의 작품은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때로는 '트리비얼리즘'적 편향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설집으로는 〈남방처녀 南方處女〉(1924)·〈해바라기〉(1924)·〈만세전〉(1924) 등이 있고, 1987년 민음사에서 〈염상섭전집〉을 펴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1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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