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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 경기 용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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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 |
국적 | 한국 |
요약 독립운동가.
이명은 조현(祖鉉 또는 肇鉉). 호는 시당(時堂).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북간도로 망명했다.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교포 자녀들의 항일민족교육에 힘썼다.
1907년 4월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특사 이준(李儁)을 안내해 이상설과 만나게 했다. 1912년 가을 퉁화 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 허혁(許赫)과 부민단을 조직해 이주동포의 자활과 교육을 맡아보았다. 1913년에는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으로서 교감 윤기섭(尹琦燮), 학감 이광조(李光祖) 등과 학교의 발전에 전력을 다했다. 그뒤 정안립(鄭安立)·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유동열(柳東悅)·신팔균(申八均)·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 39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에는 남만주 교포들의 명의로 된 한국독립청원서를 중국정부를 거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
1919년 3월에는 박찬익 등과 지린[吉林] 군사독판부를 조직해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독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간서총판부를 설치하고 총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1년 5월에는 이탁(李鐸)·김동삼(金東三)·곽문(郭文)·이진산(李震山) 등과 임시정부의 개조에 대한 토의를 하고 연서로 결의서를 작성해 상해임시정부 군무차장 윤기섭(尹琦燮)에게 보냈다.
1922년 어무 현[額穆縣]에 검성중학(儉成中學)을 설립해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진력했다. 1930년 1월에 상하이[上海]로 가서 김구·이동녕·안창호·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재결성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표방하는 항일투쟁을 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때 후퇴하는 중국군에게 심한 매를 맞고 장백산록(長白山麓)에 요양하던 중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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